"심지어 전문가라는 딸인 저마저도 엄마의 삶에는 이방인이며 위선적인 간병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한낱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딸의 독백이다."오늘이 내 여든 번째 생일이고. 내가 말을 못하니까 알아듣지도 못하는 줄 알고 내 주위에서 나를 치매 환자라고 수근대는 거 다 알아들어…."깜빡깜빡 정신이 드는 노파는 입을 삐죽인다. 퀭한 손숙의 눈은 객석을 응시하고 있지만 어느 지점에 꽂혀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의 시선은 저렇겠거니, 하는 개연성으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극단 산울림의 '나의 황홀한 실종기'(사진)는 첨예한 문제로 대두된 노인 치매를 다룬다. 극단의 상징인'고도를 기다리며'와 일련의 여성 연극에 이어 최근 잇달아 선보이는 노인 연극은 정제된 산울림표의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다. 무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앙상한 나무는, 바로 산울림의'고도…' 무대를 직감적으로 연상케 한다.
"경제적, 신체적인 문제에만 집중하는 노인 문제의 본질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어요."그 간 줄곧 번역자로, 극단의 크고 작은 일에 낮은 목소리로 참여해 온 오증자씨가 최초로 극작한 작품이다. 이 극단의 프랑스어 작품은 죄다 번역한 불문학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듯 대본은 인물들끼리 갈등, 그 밀고 당김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공허감, 준비되지 않은 노령화 문제가 본질이라는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었어요."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도 쉴새 없이 말을 쏟아대는 손숙의 언어는 '고도를…'에 나오는 럭키의 장광설을 연상케 한다. 정신은 놓아버렸지만 자식이 먼저 죽는 참척(慘慽)의 슬픔만이 갈수록 또렷해지는 노파에게 남아있는 세월은 결코 오지 않을 고도에 대한 갈망보다 처연하다. 노파가 왜 실성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몸으로 웅변하는 손숙은 이 무대에서 연기 50주년을 맞고 있다. 5월 12일까지 소극장 산울림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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