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약자이다. 이들의 정체성과 권리에 대한 논의는 철학, 여성학, 사회학 등 학문뿐 아니라 영화와 공연 등을 통해 수없이 이뤄졌다. 5월 18일까지 서울 서교동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열리는 '주디스 버틀러의 연합의 정치학으로 이해하는 젠더'전은 소수자들의 시각을 다양한 미디어아트로 선보이는 전시다. 1990년대 학계에 처음으로 '퀴어(성적 소수자) 담론'을 제시한 미국 페미니즘 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주제로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국내 발표된 실험적인 미디어아트 15점을 선보인다.
이수현 아이공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를 "소수자에 대한 우리사회 고정관념과 새로운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한 젠더 이론의 핵심은 사람의 정체성은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구성, 반복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사회가 규정한 성별을 뜻하는 젠더(gender)는 언제라도 전복가능하다고 말하며, 여성의 역할, 여성상을 사회가 미리 규정하지 않고 다양한 시선을 포괄하는 '연합의 정치'를 하자고 제안한다. 전시는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소수자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진 여성 미디어아티스트 3인의 대표작을 모았다.
곽은숙(49)은 2000년 페미니스트 예술가 그룹 '입김'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역사 속 사라진 여성, 신화, 동화를 재구성한 실험영상을 만들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한 애니메이션 3편을 전시한다. 2008년 작 '히스테리아 시리즈'는 자본주의 사회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상을 경쾌하게 비꼬고, 2012년 작 '응답하라 무능력'은 대량생산 사회에서 예술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고무공장 소녀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고무공장 큰언니'는 생산 권력에서 배제된 여성의 저항을 그린다.
여성의 몸,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주제로 한 사진, 설치작품 등을 발표해온 홍현숙(55)씨는 2005년부터 틈틈이 작업한 비디오아트 9점을 선보인다. 2007년 작 '바디 롤링(body rolling)'을 비롯한 대부분의 작품은 마지막 반전이 코믹하다. 정체 모를 푸른색 덩어리가 노란색 화면 가장자리를 따라 굴러다닌다. 푸른 덩어리를 한참 응시하다 보면, 덩어리 사이로 육중한 두 다리가 삐져 나온다. 이 덩어리는 뱃살을 출렁거리며 방바닥을 뒹구는 뚱뚱한 여자. 사람이라기보다 고무덩어리에 가까워 보이는 여자는 한참을 뒹굴다가 아예 장판으로 제 몸을 감싸버린다. 이 파란 원피스의 여자는 2009년작 '북가좌엘레지'에 또 등장한다. 재개발로 없어진 북가좌동 집터를 찾아가, 반쯤 깨진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용변을 본다. 마치 예전 그 집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성별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은 사회권력의 규정, 반복에 의해 정해진다"는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과 함께 감상하면 재미있다.
단편영화감독 원(31)의 극영화 3편도 상영된다. 재닛 윈터슨의 소설 '육체에 새겨지다'를 모티프로 한 실험영화 'Written on the Body'는 소설 구절들과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동명의 영화를 편집, 재가공한 작품이다. 2003년작 '헬멧', 2006년작 '창문 너머 별'은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극영화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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