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직장 생긴 후 죄의식 생겨… 나에게 집중했던 시간 지나타인의 이야기에 눈 돌려… 이야기의 공적 기능인 공감 고민"
재담꾼 이기호(41)를 좋아했던 독자들은 어쩌면 기로에 서게 될지도 모르겠다. 7년 만에 펴낸 그의 세 번째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발행)에는 전작와 에서 선보였던 현란하고 유쾌한 랩의 문체도, 풍자와 재치로 번득였던 성경의 번역체 어투도 없다. 천연덕스런 입담으로 아이러니와 유머의 스펙터클을 펼쳐 보였던 화려한 형식 실험의 자리에는 어느덧 차분하게 열기를 다스린 회의의 문장들이 들어섰다. 그 문장들은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의 여백을 메우며, 여전한 이야기꾼으로서 이야기의 운명을, 이야기의 윤리성을 탐색하는 이기호 소설의 2기가 출범했음을 선포한다.
"예전에는 인물들이 스펙터클 하니 뭐하니 해도 써놓고 보면 다 '인간 이기호'였어요. 나에게 집중해 있던 시간이었던 거죠. 하지만 언제부턴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라는 이야기 본래의 공적인 기능, 본질적인 기능을 고민하게 됐어요. 나로부터 멀어지는 이야기, 타인의 이야기에 눈을 돌려보자. 그래서 이번 소설집에는 1인칭 화자가 많긴 하지만 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에 실린 8편의 단편은 이기호식 유머와 입담에 제법 큰 농담(濃淡)의 차이가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과 진술되지 않은 것, 혹은 기록과 진술이 고의로 누락하거나 놓친 것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소설은 신문의 팩트들이 기술하지 않는 잔여를 복원해 주는 것"이라는 명제가 지금 이 작가를 사로잡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을 보자. 정규직 취업을 놓고 조용하지만 무섭게 경쟁하는 대학본부의 임시직 남녀('행정동'), 후진이 안 되는 낡은 프라이드 자동차를 연인처럼 여기는, 노동운동으로부터도 소외됐던 노동자 삼촌('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후배 여대생을 과도한 음주 권유로 사망케 한 제자와 그를 구명하려 탄원서를 쓰는 교수('탄원의 문장'), 수십 년간 양돈축사의 인간노예로 살아온, 두루말이 휴지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아내의 재종동생('화라지송침'), 트렁크 팬티를 반바지로 착각해 입고 나갔다 성폭행범으로 몰린 군 제대 백수('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등등. 병원 보호자 대기실에서 뇌사자의 각막이식을 기다리는 앞 못 보는 개신교 전도사와 엄마의 죽음을 손꼽아 기다리는 존재로 인해 고통과 분노에 휩싸인 뇌사자의 딸이 마주치는 어둠 속의 한때를 그린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처럼 읽다 보면 울컥하는 순간들과 마주치는 작품도 있다.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예상을 빗나간다. 작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그 빗나간 자리의 여백을 복원하고, 예상이 좌절된 독자는 그 다음이 궁금해 쉽사리 책장을 덮지 못한다. 그 빗나감의 지점들이야말로 이야기의 윤리성과 독자의 윤리성이 만나 감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타인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소설 속에 구멍이 자주 생겼다"고 했다. 어느 지점에서 침묵하거나, 설명 없이 휙 지나가는 일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한다는 것의 숙명. 결국 읽는 사람이 나머지를 채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그게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표제작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가장 이기호다운 방식으로 이 고민을 밀고 나간 작품이다. 임용고시 재수생인 최소연과 여성지의 심리상담가로 추측되는 김 박사가 Q&A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이 소설은 흡사 임용고시 문제집의 서술형 문제처럼 마지막 반 페이지가량을 밑줄 친 여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과연 김 박사가 누구인지 빈칸을 채우라며, 작가가 독자에게 이야기의 완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소설가 이기호의 생애를 문학사가 정리한다면, 그가 2008년 초 문예창작과 교수가 돼 전남 광주로 내려간 것은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돼야 할 것 같다. 앞서 기술한 이 모든 변화는 비정규직 전업 소설가에서 정규직 대학교수가 된 그의 생활의 변화에서부터 파생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죄의식이 생긴 거죠. 안정된 직장이 생겼고, 애를 셋이나 낳았고, 대출이 많긴 하지만 아파트도 마련했고…. 그런 변화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괴리가 있었고, 그 괴리가 힘들었어요. 다 허위와 위선처럼 느껴져서요. 예전처럼 가볍게 농담처럼 쓰고 싶을 때도 무겁고 묵직한 소설들이 씌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죠."
그는 "소설을 안 썼으면 생 양아치가 됐을 내가 소설 덕분에 끊임없이 회의하느라 부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누구라도 타인과 공감하게 위한 방편으로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박사…'의 출제의도는 어쩌면 작가의 윤리와 이야기의 윤리, 그리고 독자의 윤리가 행복하게 만나는 황금의 트라이앵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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