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자사 광고에 '뉴욕타임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저널리즘'이란 카피를 사용한다. 이 신문사에서 연수했던 한 선배 기자는 '뉴욕타임스…' 카피를 자기 신문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신문사가 조성한 기자의 근성을 자랑하는 광고라고 했다. 취재, 편집, 인쇄, 배달이라는 신문사 고유의 업무가 뉴욕타임스라고 다를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배 기자는 아직도 또렷한 것은 연수 당시 경험했던 뉴욕타임스 기자들의 근성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말단 사원부터 편집국장까지 기자는 '직장이 아니라 직업'이라는 정신을 물씬 뿜어내는 게 뉴욕타임스였다고 기억했다. 보스턴 테러와 텍사스 폭발 사고가 지난주 미국을 강타했을 때 이 신문이 '뉴욕타임스'가 아니라 '월드타임스' 임을 보여준 것은 이런 근성 덕이었다. 더 돋보인 것은 다른 언론이 보도해도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것은 보도하지 않는 인내의 용기였다.
보스턴 마라톤 결승선 근처에서 두 차례 폭발이 일어난 15일(현지시간) 오후부터 미국 언론은 12년 만의 본토 테러에 놀라 특보 체제를 가동했다. 속보 경쟁 속에서 AP통신, 보스턴글로브 등 다수 언론은 다음날 '용의자 확인' 뉴스를 내보내더니 그 다음날에는 용의자가 이미 체포 또는 구금됐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6월 연방대법원의 건강보험개혁법 합헌 결정을 위헌으로 보도해 빈축을 샀던 CNN과 폭스뉴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히 CNN은 스타 기자 존 킹이 용의자가 검은 피부의 남성이라고 피부색까지 거론하며 앞선 보도를 했다. CNN 및 폭스뉴스와 경쟁 관계에 있는 MSNBC는 모회사인 NBC의 보도 자제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를 체포했다는 경쟁사의 오보를 따라갔다. 이 같은 보도는 사우디아라비아 유학생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연방수사국(FBI)이 발표한 용의자 2명은 사우디 유학생과는 전혀 달랐다. 오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CNN은 믿을 만한 소식통 3명의 정보에 근거했다고, 폭스뉴스는 소식통들을 통한 확인이 잘못 됐다고 각각 해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은 또다른 오보로 그 반성의 효력이 하루를 가지 못했다.
텍사스주 웨이코 인근 비교공장 폭발사고가 나자 AFP통신을 비롯한 대다수 언론은 70명 사망설을 보도하려는 유혹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CNN, CBS 등도 현지 소방관의 말이란 핑계를 내세워 사망자를 60~70명으로 추정해 보도했다. 사망자는 결국 14명으로 확인됐고 이들의 보도는 5배나 부풀려진 착오로 드러났다. 그런 점에서 보스턴 테러와 텍사스 폭발 사고는 정확성보다 신속성을 우선한 미국 언론의 실상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뉴욕타임스는 보스턴 테러와 텍사스 비료공장 폭발 사고에서 타 언론의 보도에 침묵을 지키거나 사망자 규모를 모른다며 어찌 보면 무성의한 보도를 했다. 하지만 낙종을 각오한 이 같은 태도에는 특종보다 더한 기자의 근성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첫 여성 편집국장 질 에이브럼슨은 보스턴 테러 발생 이후 꼬박 3일을 회사에서 보내며 속보 및 오보와의 전쟁을 이끌었다. 상황이 종결되자 그는 "지난 한 주는 저널리즘에게 최고이자 최악의 시기였다"면서 "우리는 부정확성이란 루비콘강을 건넌 것 같다"고 언론들을 질타했다.
외국에서 대형 사건이 발생하면 해외 언론의 보도를 인용하며 보도할 수밖에 없는 게 한국 언론의 현실이다. 그런 마당에 해외 언론 보도의 정확성을 따지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 최근 북한 관련 보도에서 종종 들통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그것이 다시 왜곡되거나 부분적으로 해석돼 한국에 전파되고 또 어떤 때는 이름조차 생소한 미국 매체의 뜬소문 수준 북한 기사가 한국에서 대문짝만 하게 보도돼 불필요한 파문을 일으킨다. 기사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사실이든 거짓이든 따지지 않는 것은 한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뉴욕타임스의 근성과 용기가 부쩍 부럽다.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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