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여름∙겨울방학 때면 찾아갔던 할아버지 댁은 충남에 있는 한 농촌이었다.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에서 차를 내려 큰 개울을 건너 산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갈 수 있었다. 산자락에 30여 호가 옹기종기 들어앉은 중간 크기의 동네였다. 집성촌이었는데, 할아버지처럼 성이 다른 집은 10호가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0년대 여느 시골과 다를 게 없는 그 동네에는 '망나니'가 있었다. 나와는 한참 나이 차이가 나는 그 형은 술만 취하면 행패를 부리며 마을을 한바탕 뒤집어 놓곤 했다. 형은 동네에서 가장 어른인 할머니 집에 살았는데, 어려서 부모를 잃어 큰 집에서 거둔 처지였다. 형은 어려서부터 말썽을 부려 중학교를 제대로 마치지도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술버릇은 더 고약해졌다. 방학 때 할아버지 댁에 가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큰아버지에게 지게 작대기로 두들겨 맞는 형을 심심치 않게 봤다. 그 때마다 말린 것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형이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불쌍한 것한테 왜들 그러느냐"며 역성을 들었다. 형은 큰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면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빌고 잠시 조용해졌지만, 술버릇은 되풀이 됐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어느 여름날 서른 살에 가까워진 그 형이 큰 사고를 쳤다. 그때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사고 치고 집으로 돌아온 형을 마당에서 소죽 끓이던 할머니가 불이 붙은 부지깽이로 매타작을 한 것이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할머니가 지쳐 그만둘 때까지 형은 맞았다. 어른들의 수군거림과 뒤숭숭한 동네 분위기가 다른 때보다 오래 가서 큰 사고를 쳤다고 생각했다. 형이 말 못할 패륜적인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커서야 알았다. 형은 그 후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 빈집에 따로 나와 살았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고 없는 듯이 지냈는데 중2 겨울방학 때 가니 형은 이미 숨진 뒤였다. 산밭에 서릿발이 서기 시작하던 초겨울 읍내에 갔던 형이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자다 동사했다는 거였다. 술버릇을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새 정부 들어 북한의 전쟁 위협이 어느 때보다 거세다. '핵전쟁' '정전협정 폐기' '전쟁은 시간 문제' 등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섬뜩하고 살벌한 수사는 다 거론해서 남아 있는 말 위협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때도 열어 놓았던 개성공단 문마저 걸어 닫았다.
이런 위협에도 꼼짝 않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1일 대화를 제의했다. "북한이 위협과 도발을 하면 협상과 지원을 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던 박 대통령의 갑작스런 대화 제의에 주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생뚱맞다"와 "짜증난다"였다. 생뚱한 느낌은 아무 이유 없이 대북 대응 기조를 바꿨다는 것 때문이고, 짜증은 박 대통령 스스로 끊어야 한다고 강조한 그 악순환을 다시 시작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다.
북한은 14일 박 대통령의 대화 제의에 대해 "북침 핵전쟁 연습과 동족대결 모략 책동에 매달려온 자들이 사죄나 책임에 대한 말 한마디 없이 대화를 운운한 것은 철면피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18일에도 한국과 미국에 "진실로 대화와 협상을 바란다면 모든 도발 행위들을 즉시 중단하고 전면 사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졸지에 봇짐 빼앗기고 뺨 맞은 것도 모자라 강도로 몰린 셈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사실 내 주변에는 "북한을 잘 다독거려 사이 좋게 지내며 핵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정부의 뜬금없는 대화 제의에 짜증을 내면서 보다 확고한 대북 자세를 요구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태도를 바꾼 것은 북한의 되풀이되는 행태에 염증이 난 탓도 있지만,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에 성공한 상황에서 어설픈 대화로 그들에게 더 이상 시간을 줄 수 없다는 '진짜 위기감' 때문이다. 지금은 생떼 받아주기 보다는 할머니의 따끔한 부지깽이 매를 들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 북의 젊은 지도자가 버릇을 고칠지 못 고칠지는 그 다음 문제다.
김동국 정치부 차장 d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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