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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여성 배려라고?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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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여성 배려라고? 모독이다!

입력
2013.04.1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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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뭔가 일이 꼬였을 때 제 허물을 되짚기보다 탓할 거리를 찾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매사에 남 탓, 상황 탓 하는 것만큼 지질해 보이는 것도 없다. 김연아가 빙질을 탓하고, 류현진이 컨디션을 구실 삼고, 싸이가 벼락 출세에 따른 심리적 압박을 핑계 댔다면, 오늘의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 특출한 스타들까지 들먹일 것 없이, "실수를 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란 건 고3 수험생들도 다 아는 얘기다.

그 뻔한 이치를 박근혜 정부 사람들만 모르는지, 일만 터지면 핑곗거리부터 찾기 바쁘다. 논란 끝에 자진 사퇴한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는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나팔을 불더니, 인사청문회를 황당한 코미디로 만들어 버린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는 뒤늦게 '무대 공포증'을 끌어댔다. 그는 8일 보도자료를 내 유감을 표명하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국회의원님들의 집중 질문을 받는 과정에서 당혹스러운 나머지 알고 있는 내용조차 충실하게 답변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박 대통령도 12일 민주통합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인사 문제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면서도 한마디 거들었다. "쫄아서"인지, "쪼니(몰아붙이니)"인지, 기사마다 말은 좀 다른데, 아무튼 "당황해서 머리 속이 하얘졌다더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실력은 없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 2일 인사청문회를 지켜본 국민들 가운데 이런 어설픈 해명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 대목만 돌려 보자. "우리 어업 GDP 비율은 아세요?" "GDP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하하." "해양수도가 되기 위한 비전이 뭡니까?" "해양… 크크." 나랏일 맡겨 달라며 나선 사람이 "몰라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도 기가 차는데, 말끝마다 흘리는 기기묘묘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여당 의원들이 "떨리지 않느냐"고 거들 듯 물어도, 그는 "발표 같은 걸 많이 해봐서 떨리는 건 별로 없다"거나 "떨리지 않는 게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고 태연하게 답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윤 후보자는 무슨 배짱인지 인사청문회 리허설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구원 출신 장관 지명을 영 못마땅해 한 해양수산부 간부들이 청문회 준비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모두 사실이라면 불성실한데다 업무 장악력도 형편없다는 얘기다. "임명되더라도 식물장관이 될 수 있다"는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우려가 결코 지나치지 않다. 국민 여론도 절대다수가 임명 반대 쪽에 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사자나 인사권자는 아직도 논란의 초점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15일 MBC 라디오에 출연한 윤 후보자는 '식물장관 우려'에 대해 "좀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라고 받아쳤다. 뭐 대단한 근거라도 대는가 했더니 "제가 연구기관 본부장으로 있을 때 우리 부처가 식물부처였다는 얘기냐"는 반문이 고작이었다. 정무적인 능력 부족을 인정하면서도 "새 정부의 국정기조에 맞춰서 열심히 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한심한 주장만 늘어놓았다. 박 대통령이 보증한다는 실력 역시 "연구한 게 많고 해양수산부 폐지 반대 토론을 하며 설득력 있게 얘기를 잘했다"는 게 전부였다.

당사자와 인사권자만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2인3각 놀이'를 지켜보며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여성 발탁' 운운하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야당의 협조를 구하며 "그 분야에서 여성을 발탁해서 키워보겠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윤 후보자도 "또 다른 분야로 여성을 진출시키고 키우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도움을 호소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는 것도 참을 수 없지만, 여성이니까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자는 태도는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기어이 윤 후보자를 장관으로 앉힐 태세다. 후폭풍을 어찌 감당할 작정인지 한숨만 나온다.

이희정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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