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수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15일 사의를 밝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주요 공공기관 및 공기업 수장들 가운데 다섯 번째이자, 41개 기관을 거느린 '공룡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의 산하 기관장들 중에선 첫 번째 사의 표명이다.
사실 주 사장의 사의는 예견된 수순이다. 아니 오히려 예상보다 뒤늦은 감이 있다. 현대건설 회장 출신의 이명박 전 대통령과 옛 직장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현대종합상사 부사장까지 지냈던 그는 자타공인의 대표적 'MB맨'이다. 지난달 11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기관장에 대한 인사가 많을 텐데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하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한 뒤부터 주 사장 같은 MB맨들의 퇴진은 기정사실이었다. 오직 '시점'이 문제였을 뿐이다.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MB맨들은 줄줄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4대강사업의 일등공신인 김건호 전 한국수자원공사 사장(3월 13일)을 시작으로, MB노믹스의 설계자인 강만수 전 산은금융지주 회장(3월 28일), 역시 현대건설 출신이었던 이지송 전 LH공사 사장(3월 28일) 등이 잇따라 사퇴했다. 그리고 이 전 대통령의 고려대 동문으로 "내년 3월까지인 임기를 지키겠다"고 했던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도 지난 14일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팔성 회장의 사의표명 하루 뒤, 주 사장도 퇴진의 뜻을 밝혔다.
여기까진 좋다. 지난 정권에서 '낙하산'으로 임명된 인사들이 새 정부 출범 후 물러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운운하며 계속 버티는 것 자체가 구차해 보일 정도다.
문제는 그 다음, 그들의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다. MB맨들이 빠져나간 곳에 '친박맨'들이 들어온다면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 정권 잡고, 지난 정권 사람들 쫓아내고, 논공행상에 따라 정권창출 공신이나 여권인사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고,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면 다시 쫓겨나고…. 우리나라에서 5년마다 볼 수 있는 아주 익숙한 장면들이다.
우려는 벌써 현실화하고 있다. MB맨들이 사퇴한 5곳의 공기업 수장 가운데 지금까지 딱 한 자리만 후임이 임명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친박인사였다. 홍기택 신임 산은금융지주회장 얘기다. 그는 박 대통령과 같은 서강대 출신으로, 박 대통령의 대선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금융문외한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연고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산은금융지주회장에 임명되기 힘든 인사다.
지금 분위기라면 나머지 자리들도 친박맨들로 채워질 공산이 크다. 공석이 된 우리금융지주회장은 물론, 7월에나 자리가 나게 될 KB금융지주회장까지 하마평에 등장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친박인사들이다. 서강대 출신의 이덕훈 키스톤 프라이빗에쿼티 대표(전 우리은행장)나 민유성 티스톤 회장(전 산은금융지주 회장), 서강대 교수 출신의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등…. LH공사나 가스공사 사장 자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식이라면 공기업 사장에 포진한 '친박맨'들은 5년 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또 다른 '아무개 맨'으로 바뀔 것이다.
이런 권력교체에 골병이 드는 건 해당 공기업들이다. 대선 전부터 새 사장이 임명될 때까지 적어도 몇 달간은 그야말로 경영공백 상태다. 퇴진이 기정사실화된 '식물사장'이 뭘 결정할 수도 없고, 새 사장이 온들 업무파악 때문에 몇 달은 허송세월이다.
이런 상태에서 공기업선진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금융이나 산은지주의 경쟁력을 운운할 수나 있을까. '국정철학공유'를 내세운 낯간지러운 논공행상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김정우 산업부 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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