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열정의 디바’ 인순이, 다문화 대안학교 교장 되다
몇 해 전 취미로 그림을 배운 가수 인순이(56)는 우산을 즐겨 그린다. 우산 더미를 발판 삼아 날개를 펼치는 거위들, 사람 인(人) 모양으로 기대 선 우산 두 개…. 올 1월 펴낸 자전적 에세이 에 실린 그의 그림들은 거칠고 소박하지만 눈길을 잡아 끄는 묘한 힘이 있다. “열여덟 살 땐가 시외버스 타고 서울에 처음 와 봤어요. 피카디리 극장 앞에 내리니 폭우가 쏟아져 근처 제과점에 뛰어 들어갔죠. 눈 마주치면 나가라 할까 봐 창에 꼭 붙어 서 있는데, 우산 파는 소년들이 뛰어 다니고, 둘이 한 우산 쓰고 걷는 사람들도 있고… 보면서 너무 좋았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우산이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은 게.”
그에게 우산은 자기만의 세계이자, 사랑하는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보호해 주고픈 마음이다. 서른여덟 늦은 나이에 딸을 낳아 키우며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그가 더 많은 딸, 아들들을 보듬어 줄 넓고 튼튼한 우산을 조심스레 펼쳤다. 강원 홍천군 남면 명동리에 자리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기숙형 대안학교 해밀학교가 문을 연 11일, 축복처럼 비가 내렸고 색색의 우산들이 교정을 가득 메웠다.
해밀학교 이사장이자 교장으로 새 삶을 시작한 ‘열정의 디바’를 지난 9일 늦은 밤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열린음악회’ 녹화를 마치고 와 몹시 지쳤을 텐데 아이들 얘기가 나오자 금세 수다쟁이가 됐다. “엊그제 아이들이 짐 싸 들고 왔어요. 부모님들이랑 다같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데 와~ 정말 미칠 듯이 좋더라고요. 오늘은 선생님들이랑 텃밭에 감자를 심고 마을에 있는 생활협동조합 김치공장 견학도 다녀왔대요.”
-아이들이 뭐라고 불러요? 교장 선생님?
아직 호칭은 안 쓰던데요. 교장 선생님은 제가 어색하고, 이모 아니면 고모? 그것도 좀 그렇고. 뭐가 좋을지 아이들한테 한번 물어 봐야겠네요.
-학교 이름이 참 예뻐요. 직접 지었나요?
인터넷에서 찾았어요, 순우리말로.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란 뜻인데, 정말 예쁘죠? 주위 분들께 지어달랬더니 자꾸 ‘다’를 넣는 거예요. 다함께, 다같이, 다행복…. 뜻은 좋지만 다문화라고 선을 그어 놓는 것 같아 마음에 안 차더라고요.
-다문화 학교를 만들게 된 계기는 뭔가요?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10년 전쯤이에요. 나보다 잘난 가수들도 많았는데 이 나이까지 무대에 남아 어린 후배들 틈에 설 수 있는 건 내 힘만이 아니다, 사랑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그런 생각. 양로원을 할까, 보육원을 할까 궁리만 하다 2010년 추석 무렵 라디오에서 다문화 아이들의 고교 졸업률이 28%밖에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게 내가 할 일이 아닐까 싶었어요. 한참을 망설였어요. 솔직히 이만큼 성공했는데 다시 다문화로 엮이는 게 부담스러웠던 거죠. 자문자답을 해봤어요. 그런데 왜 마음이 끌리지? 내가 그렇게 살았잖아, 엄마조차도 내 태생적 비애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면서. 저 아이들은 어떨까? 내가 힘이 되어줘야 하지 않나?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지인들을 모아 TF팀을 만들었어요. 터를 못 구해 한참을 고생하다 최문순 강원도지사의 도움으로 홍천과 인연을 맺게 됐죠.
해밀학교의 궁극적 목표는 중고통합 6년 과정의 기숙형 대안학교로, 숙식비 일부를 제외한 모든 비용이 무료다. 학년별 정원은 20명(전국 다문화 학생 70%, 강원지역 일반 학생 30%)인데, 시설이 협소해 당분간 여학생만 받는다. 3년 안에 정식 학교 인가를 받고 폐교를 얻어 옮길 계획이란다. 첫 입학생은 중1ㆍ2학년 7명. “작지만 내실 있는 학교를 만드는 데 역점을 두고 홍보를 자제했어요. 좋다고 소문 나면 알아서 찾아오지 않겠어요?”
오전에는 국어 영어 수학 등 교과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음식만들기, 바느질, 연극ㆍ영화, 풍물, 제2 모국어 등 다양한 특성화 교육을 한다. 교사 1명 당 학생 5~6명씩 모둠을 지어 수업 전후 산책과 명상, 하루 일과 정리 등을 함께하는 ‘작은 학교’를 운영하고, 학생과 교직원들이 공동출자 해 협동조합도 만들 계획이다. “닭 모이 주고 텃밭 농사 짓고 달걀이며 작물들을 내다 파는 것까지 체험하다 보면 부모님의 노고와 노동의 가치, 돈의 소중함을 저절로 깨닫는 살아있는 경제교육이 되는 거죠.”
-운영 자금은 어떻게 조달하나요?
제가 열심히 벌어야죠. 후원자라야 1호는 남편이고, 아는 언니가 좀 보태주고, 밴드 멤버들한테 몇 만원씩 받아낸 것뿐인데, 벌써 다 썼어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협약을 맺어 정식으로 후원을 받으려고 해요. 개교식에 화환 보낼까 싶어 초청장에 ‘꽃보다 양식을’이라고 썼어요. ‘꽃보다 현금을’ 이러면 너무 속 보이니까.(웃음)
-교장까지 맡은 건 뜻밖인데.
공모를 했는데 마땅한 분이 없었어요. 주위에서도 틀이 잡힐 때까지는 직접 하는 게 좋다고들 하고. 기억도 가물가물한 시험 공부란 걸 해서 ‘다문화케어상담사’ 자격증을 땄어요. 대안학교 여러 곳을 견학했고, 계속 자문도 받고 있어요. 뉴욕 공연 갔을 때 식당에서 누가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데 강화도의 대안학교 교장이시래요. 얼마나 반갑던지 “교장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하고 붙잡고 늘어졌죠.(웃음)
-가수 활동과 병행하기 쉽지 않을 텐데.
몸은 견딜 만한데, 먼 길을 시도 때도 없이 오가느라 기름값이 엄청 들어요. 밴 타고 다니다 요즘은 승용차를 이용하는데, 아예 SUV나 경유차로 바꿀까 싶어요. 그렇다고 가수 활동을 줄일 순 없죠. 아이들한테 롤 모델이 되려면 무대에서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죠. 선생님들이 워낙 잘해 앞으로는 1주일에 한두 번만 가면 될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게 뭔가요?
가장 중요한 건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도록 돕는 거예요. 저야 얼굴부터 완전 딴판이니 숨길 수도 없었지만 아시아 혼혈의 경우 한국 아이랑 생김새가 비슷하잖아요. 완전히 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같지도 않고, 그래서 더 혼란을 느낄 수 있어요.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건 우리 잘못이 아니죠. 서로 사랑을 했든 돈 때문에 결혼했든 부모가 벌여놓은 일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은 거죠. 하지만 그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강해질 수 있어요. 그것이 대한민국 사람으로 당당히 서는 첫 걸음이에요.
물론 죽어라 애쓴다고 다 되지는 않죠. 부족한 몇%를 채워주는 건 사랑밖에 없어요. 제 고향(경기 연천군)에 가면 아직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어르신들이 계세요. 콜린 파월 아저씨(전 국무장관)가 2010년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상을 받을 때 제가 축가를 부르면서 “용감한 나라의 아버지를 주시고, 해 돋는 나라의 어머니를 주신 것에 감사한다. 두 나라 사이에 제가 있다는 걸 기억해달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어요. 그분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그래서 온전한 한국 사람으로 살지 못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죠. 이 아이들에게도 너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너희는 특별하고 세상 어딘가에 꼭 필요한 사람이란 걸 알려주고 싶어요.
-에세이집에서 ‘내 가슴에 있는 내 아빠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낯선 나라에 온 영웅’이라고 썼더군요. 원망도 많이 했을 텐데, 언제부터 그렇게 이해하게 됐나요?
열 서너 살 때예요. 그렇게 정리하고는 오랜 고민을 딱 접었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완전 애늙은이였던 거죠.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요. 어렸을 때 그렇게 어른스럽더니 요즘은 철없는 애처럼 살고 있어요.(웃음)
-따님이 처음엔 학교 만드는 걸 반대했다던데.
다문화 아이들이 보통 사람들과 섞여 지내야지, 왜 따로 떼어놓으려 하느냐고 따지더라고요. 공교육이 뒤처진 아이들까지 다 보듬고 가진 못하지 않냐, 선생님들이 아무리 애써도 이 아이들 가슴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응어리나 구멍 같은 게 있다, 엄마가 그걸 풀어주고 채워주고 싶다, 그렇게 설득했어요. 한때는 그쪽으로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았던 제가 다문화 학교를 만들겠다고 용기를 낸 건 딸 덕이 커요. 지금은 미국 유학 중인 딸이 고등학생 때 펄벅 재단 학생회장도 하고, 다문화 관련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다문화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어요. 그 열정에 감동하고 자극도 받으면서 용기를 냈죠.
11일 해밀학교 개교식은 궂은 날씨 속에서도 성대한 마을잔치로 치러졌다. 마을 이장과 한살림 생협에서 한 마리씩 돼지 2마리를 희사했고, 인순이의 팬과 서울예술학교 동료 교수가 힘을 써 아이스크림 차, 치킨 차까지 동원했다. 절친한 선배인 패티 김이 축사를 했고, 박미경, 김태우, 알리 등 후배 가수들이 축하 공연도 했다. “특히 동네 분들에게 너무 고마워요. 아주머니들이랑 지난 겨울에 김장, 된장 함께 담그고 이날 잔치 메뉴도 한달 전부터 같이 짰어요.” 늘어지는 자랑에 한마디 거든답시고 “인복이 많은 걸 보니 ‘아 내가 잘 살아왔구나’ 싶겠다”고 했다. 뜻밖에도 그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싹 사라졌다.
“제가 잘못한 일이 하나 있잖아요.” 그는 2011년 제기한 50억원 사기 소송으로 구설에 오르고 그 와중에 3년 전 세금 9억원을 추징당한 사실이 알려져 곤욕을 치렀다. 최근 다시 불거진 국세청 세무조사 설에 대해 “소송 건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비난 여론을 잠재우진 못했다. 그는 내막을 묻자 “지금 말해봐야 진흙탕 싸움만 된다”며 말을 아꼈다. “뻔뻔하게 고개 쳐들고 계속 무대에 오른다고 비난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지만, 노래는 포기할 수 없어요. 무대에 못 서면 저는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소송 끝나면 다 밝힐게요. 잘못한 건 깊이 반성하고 더 열심히 노래할게요.”
-어릴 적부터 꿈이 가수였나요?
꿈이란 말은 제 사전에 없었어요.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도 없죠. ‘동동구리무’ 장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느니 그런 글도 있던데, 사실이 아니에요. 돈이 없어 고등학교에도 못 가고 집에서 열세 살 어린 여동생 돌보고 있을 때 고 한백희씨(김완선의 이모)가 찾아왔어요. 색다른 팀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그게 희자매예요. 돈 준다기에 따라 나섰어요. 노래는 물론이고, 현대무용에 설장구, 오고무, 무당춤까지 별 거 다 배웠어요. 하도 몸이 아파 밤마다 끙끙 앓곤 했는데, 그때 제대로 트레이닝을 받은 거죠.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80년 솔로로 독립한 뒤 80년대 후반 극심한 슬럼프를 겪을 때도 그는 밤무대에서 번 돈으로 밴드를 결성하고 무용팀을 만들어 새로운 레퍼토리를 끊임없이 개발했다. 그런 노력이 93년 신설된 ‘열린음악회’를 통해 빛을 발했다. 2004년 조PD와 함께 부른 ‘친구여’, 2007년 카니발의 곡을 리메이크 한 ‘거위의 꿈’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10대, 20대까지 팬 층을 넓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노래는 히트곡이 별로 없다. “히트곡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더 노력했고, 대중이 원하는 노래를 불렀으니까.” 그는 요즘도 1년에 예닐곱 번은 밤무대에 선다. “나를 키워 준 무대잖아요. 감각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돼요. 시쳇말로 잘 팔리니까 부르는 거 아니겠어요? 어느 무대서든 내 밥벌이는 한다는 거죠.”
-나쁘게 보면 저만큼 뜨고도 악착같이 돈 벌려 한다고 비난할 수 있는데.
악착같이 버는 게 어때서요? 신경 안 써요. 좀 유명해졌다고 저 위에서 (팔짱 끼고 턱 치켜들며) 이러고 내려다 보면 안 되죠. 내가 대중이라면 그런 가수 싫어할 것 같아요.
-목 관리, 건강 관리 비법은 뭔가요?
그냥 잘 자려고 해요. 요즘처럼 머리 속이 복잡할 땐 일곱 시간 정도 푹 자요. 예전엔 목 관리를 위해 공연 이틀 전부터 가족하고 말도 안 했는데 요즘엔 덜 해요. 배짱이 좀 생긴 거죠. 운동은 피트니스센터 같은 데선 답답해서 못 하고 가끔 아침 식전에 왕복 1시간쯤 걸리는 뒷산에 후다닥 올라갔다 와요. 몸매 관리하려면 근육 운동도 좀 해야 하는데 잘 안되네요. 팔뚝 살 늘어지고 난리 났어요. 벗겨 놓으면 완전 장군이에요, 장군.(웃음)
-가수여서 가장 좋은 점, 가장 힘든 점은 뭔가요?
다 좋아요. 직업이 있다는 것도 좋고 사랑 받는 것도 좋고. 특별히 힘든 건 없어요. 무슨 일을 하든 힘들지 않겠어요? 인생 자체가 고해잖아요. 어려움이 닥치고 깨지기도 하고 그게 당연하죠. 그렇게 부딪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죠.
-편지 글 형식으로 엮은 에세이집보다 더 깊은 얘기를 담은 자서전을 쓸 계획은 없는지.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았는데, 중간 점검으로 쓰고 싶진 않아요. 더 늙어서는,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죠.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내 삶이 남들에게 흥밋거리로 읽히는 게 싫어요. 많이 팔렸네, 안 팔렸네, 그런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싫고요.
-따님이 엄마의 무대 모니터링을 깐깐하게 한다는데, 가수가 되겠다고는 하지 않았나요?
한때 그랬는데, 제가 말렸어요. 성공하기도 힘들고 요즘은 생명력이 너무 짧잖아요. 언젠가 누가 물으니 ‘엄마를 뛰어넘을 자신이 없어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대학 나와서 전문직을 갖고 난 뒤에 하고 싶다면 하라고 할 거예요. 돌아갈 데가 있으니까.
-올해 데뷔 35주년인데.
새 앨범을 준비 중인데, 작업이 더디네요. 나이 탓에 제약이 참 많아요. 저더러 ‘희망의 아이콘’이라고들 하는데, 이 나이에 애절한 사랑 노래를 부르기도 뭣 하고, 요즘 애들처럼 ‘이 밤에 너를 유혹하겠어’ 이럴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댄스 곡도 가사는 죄다 건전가요예요.(웃음) 작곡가들이 뽕짝도 안 시켜줘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음반이 5월에 나오는데, ‘블랙& 화이트’로 해서 화이트에는 오케스트라 편곡 발라드를, 블랙에는 댄스 곡을 담을 거예요. 앨범 나오면 전국 투어 콘서트도 열 계획입니다.
몸이 두 세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와중에도 그는 해밀학교 새내기들과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할 꿈에 부풀어 있다. “한번에 하려면 한 달이 걸린다는데 5박6일 정도씩 끊어 차례로 걸으려고 해요. 저는 옆에서 뒷짐 지고 함께 걸어주는 것이 아이들을 잘 키우는 길이라 생각해요. 걷다가 한마디씩 툭 던지는 거죠. 비가 오네, 비는 곡식을 잘 자라게 해주지만 폭우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내 말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다시 얘기해보자,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오래오래 같이 걷고 싶어요.”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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