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는 '분노'하라고 요구하는데, 우리나라는 '자제'하라고 촉구한다. 전 세계에 몰아닥친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는 태도가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사람은 정말 풍토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많이 받는가 보다. 하늘과 땅이 맞닿을 정도로 낮게 깔린 구름과 칙칙한 날씨에 길들여진 북국의 사람들이 사유하는 것을 좋아하고, 파란 하늘에 밝게 빛나는 햇살에 익숙한 남국의 사람들은 별 걱정 없이 삶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똑 같은 문제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고민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별스럽지 않게 여긴다. 이 모든 것이 풍수의 영향 때문인가, 아니면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심성구조 때문인가?
요즘 갑자기 논의되고 있는 울화(鬱火)에 관한 담론을 지켜보면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최근 어떤 신문이 기획한 '욱하는 한국인, 자제력 잃은 한국'이라는 시리즈가 조금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해서 사소한 일에도 욱하고 심지어 큰 사고를 저지르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욱하고 저지르는 범죄사건의 예들을 보면 정말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신성한 관계로 여겨졌던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세상이 병들어도 단단히 병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욱하는 한국인의 과격, 과민한 행태를 극복하려면 '감정 절제'의 계몽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도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욱하며 갈등을 빚는 것일까. 겉으로 드러나는 폭력 현상보다는 그 원인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울화통이 치미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한때 저지른 부당한 방법을 관행으로 정당화하는 것에도 열이 나지만, 표절, 탈세, 병역특혜, 부동산 투기 같은 온갖 비윤리적 행위에도 공직을 유지하는 뻔뻔함에는 열이 치받는다. 이런 일에도 우리는 분노하지 말고 감정을 자제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21세기의 세계적 문제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제기되었을 때도 우리는 침묵했다. 이 때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지성인 스테판 헤셀이 쓴 저항적 선언문인 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지성인은 때때로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유럽의 지성인들은 사회적 분노를 촉구하는데,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자제하라고 하는 것일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는 근본적으로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갈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생긴다. 다른 사람에게 관계는커녕 관심마저 갖지 않는다면 갈등할 일도 분노할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분노는, 사회가 지금 있는 이 상태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관심의 부정적 표현이다. 이런 분노보다 더 나쁜 것은 사실 무관심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졸렬하고 비굴할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살아야지.' 우리 모두가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사회에 대한 분노 감정의 자제는 '무관심'만을 양산할 뿐이다. 사회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참여는 '분노할 줄 아는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이제까지 올바로 분노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갈등을 죄악시하고 가족적 화합을 신성시하는 전통 유가사회에서 성장한 우리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우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심은 있는데 표현하지 못하면 병이 되는 것처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분노가 올바른 시기에 올바른 방법으로 표출되지 않고 억제되어 상당기간 누적되면 울화병이 생기는 법이다. 그렇다면 화를 다스릴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분노를 무조건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분노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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