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중반인 내가 중고등학생일 때 우리의 문과 선생님들은 현재 교육행정 시스템으로 따지면 그리 유능하지 않았을지라도 학생의 사고 지평을 여는 문학적 수사에는 능했던 것 같다. 그 중 '지도 그리기'라는 은유가 있다. 그 말은 실제 지리적 지도를 그리는 데서부터 각자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행하는 데까지 하나의 원리이자 방법론으로 뜻풀이할 수 있다. 해서 뭔가를 큰 틀에서부터 알고 득하는 일, 예컨대 세계를 이해하고 지식을 얻고 나 자신을 키우는 일에 '지도가 좀 그려지냐'는 옛 스승의 질문이 오늘 여기서 다시금 새롭게 던져진다.
모더니즘 시대에 세계를 지도 그린다는 것은 거대한 세계를 과학의 원리와 방법을 동원해 실측한 후 일정 비율로 축소시켜 그리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세계의 지도는 정확한 실측과 수학 및 지리학을 적용한 축소술을 통해서만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천억 장의 탐사사진 지도, 수백 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영상 지도, 핵 위험국가를 감시하는 위성 지도 등 매체나 기술이나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세계는 다양하게 편집될 수 있다. 요컨대 '부분들의 편집기술'을 통해 전체가 구현되는 메커니즘. 이것이 동시대 문화와 학문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만능의 편집술이 잘못 쓰이면 문화는 조각나고 학문은 거짓이 된다. 또 그런 편집술이 넘쳐나면 본말이 전도되고 진위가 무분별해진다.
어제 오늘 배우와 방송인이 연이어 논문 표절 사실을 사과하고, 새 정부 고위공직자 후보들이 줄줄이 인사 청문회 검증 과정에서 논문 표절 혐의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국내만 그런 것도 아니다. 2월 독일에서는 교육부 장관이 1980년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사임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빈도가 높다. 올해 논문 표절 논란만 해도 대중의 성공 욕구를 자극했던 일명 '스타 강사'에서 시작해 공직후보자, 현직 도지사, 대형교회 목사, 국회의원, 스포츠선수 등으로 확대되면서 언론의 고정 뉴스가 되는 추세다.
논문 표절이 이렇게 다방면에서 일상으로 행해지고 다양한 영역에서 무더기로 적발돼서일까? 사람들은 이 상황에 놀랄 것도 없다는 반응이다.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 중 압도적인 의견이 '누구나 다 논문 표절한다'이고, 심지어 '출세하려면 그런 관행을 따르라'는 명령조 조언도 있다. 석사든 박사든 학위 받은 사람이면 무조건 혐의자라는 분위기마저 팽배하다. 그런데 정말 악덕이 쌓이고, 문제가 곪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온상은 바로 여기다. 즉 한 개인의 표절이라는 특정 사실을 일반화하고 나아가 그것이 현실 논리라고 서로가 내면화하는 메커니즘이 사태의 골수 병폐인 것이다. 혹자는 논문을 표절하는 인간이 그리 많으니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아니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애초 그 표절의 관행이 시작되던 때 누군가의 동의, 어떤 인정 시스템, 현실의 손익 계산이 없었다면 그런 일이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다면 지금 여기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논문 쓰기를 위한 학문 윤리와 지성의 도덕을 표절 관행 대신 당연하게 내면화했을 것이다. 또 학적 엄밀성이 개인의 지적 성장은 물론 성공한 공동체의 지도 그리기로 연결되는 현실 논리를 자연스럽게 따르며 살고 있을 것이다.
이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같은 문제가 아니다. 표절은 지성의 형성이라는 닭에서 나온 알도 아니거니와 그 닭을 있게 한 모태도 아니기 때문이다. 논문 표절은 단지 지성을 무너뜨리러 오는 불온한 침입자, 학문세계 외부의 저급한 도둑일 뿐이다. 타인의 지식을 훔쳐 상아탑 뒤편에서 돈과 권력이라는 액면가 지식으로 맞바꾸는 이들, 혹은 다 그렇고 그렇다고 믿는 이들은 원대한 세계 지도는커녕 자기 인생 지도의 한 점조차 제 손으로 그리지 못한 채 질질 끌려 다닌다. 무엇에? 남들이 다 알아채는 무지(無知)에. 지도를 그릴 줄 아는 이라면 피하는 한치 앞의 유혹에.
강수미 미술평론가ㆍ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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