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용평가사들이 STX그룹의 회사채 신용등급 조정을 놓고 저마다 독자적 평가를 내려 눈길을 끌고 있다. 통상적으로 국내 신평사들은 선제적 대응보다는 기업부실이 가시화 된 이후에야 일제히 같이 움직이곤 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기업평가는 STX조선해양이 1일 경영개선 및 재무안정화를 위해 채권금융기관 공동관리(자율협약)를 신청하자 바로 다음날 STX와 STX조선해양과 계열사인 STX팬오션 STX중공업 등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했다. STX조선해양의 채권단 공동관리 신청이 그룹 전반의 유동성 위험을 높이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 3일에는 한국신용평가가 STX와 STX조선해양은 물론 STX팬오션과 STX엔진의 신용등급을 낮췄다.
반면 나이스신용평가는 2일 STX와 STX조선해양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BBB+로 유지하면서 '하향검토 등급감시 대상'에 지정한 데 그쳤다. 이삼영 나이스신용평가 기업평가1실 실장은 "공동관리를 한다는 것만 가지고 일률적으로 신용등급을 내리기보다 신중히 판단하기로 했기 때문"이라며 "STX팬오션처럼 그룹과 영업 및 재무적으로 관련성이 거의 없는 계열사들은 그대로 뒀다"고 설명했다.
같은 회사지만 신평사들에 따라 등급이 BBB+과 BBB-로 엇갈리자 STX 그룹의 분석을 담당해온 증권사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의 신용등급 하향조정이 지나쳤다고 보는 전문가들은 "STX조선해양과 관련성이 적은 계열사마저 일제히 신용 등급을 하향한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여론 눈치보기"라고 주장한다. 조병희 키움증권 연구원은"STX조선해양이 공동관리에 들어간다고 해서 두 회사간 연관성이 적은 STX팬오션의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보기 어렵다"며 "특히 STX팬오션이 매물로 나온 상황이라 그룹에서 벗어날 경우 더욱 그렇다"고 답해 계열사들까지 엮어 신용등급을 내린 신용평가사들의 행보에 물음표를 던졌다. 한편 "애초에 내렸어야 했던 것을 이번 기회에 묶어서 내린 것"이라는 긍정적 시각도 있다.
공교롭게도 한국기업평가는 지난해 웅진그룹의 지주회사인 웅진홀딩스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직전까지 웅진홀딩스의 등급을 A-로 유지했으나, 하루 만에 D등급으로 강등해 뒷북 조정 비난이 쏟아졌다. 그때의 실수가 부담이 돼 이번에 경쟁사보다 한발 앞서 강등에 나섰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이번에 신중한 행보를 보인 나이스신용평가도 당시 웅진홀딩스의 신용도를 갑작스럽게 내리긴 했지만,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한 달 전 A-에서 BBB+로 등급을 하향 조정한 바 있어 비난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실추된 국내 신용평가사 평가체제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번 STX의 경우처럼 신평사간의 평가가 엇갈리는 사례가 더 늘어야 한다며 반기는 분위기다. 또 이번 STX의 신용등급 강등 논란을 계기로 국내에 독자신용등급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독자신용등급이란 정부나 모기업, 계열사의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고 개별 기업의 채무상환 능력만을 평가해 신용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임형준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신평사들이 뒷북 조정에 대한 핑계로 자주 언급하는 게 바로 계열사 지원"이라며 "독자신용등급이 도입되지 않는 이상 뒷북 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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