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일반고 1학년생 A군의 귀가 시간은 매일 밤 11시30분이다. 아침 6시30분쯤 일어나서 잠 덜깬 눈으로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7시쯤 집을 나서니까, 하루 24시간 중 17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셈이다. 학교 수업은 오후 5시쯤 끝나지만 야간‘자율’학습(야자)이란 것이 있어 수업을 마친 후 급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는 다시 밤 11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다. A군은 일주일에 두번은 야자를 빠진다.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학원에 갈 학생들은 야자를 두번까지 빼준다.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건 영어, 수학 과목의 이른바 선행학습이다.
학원에 가도 A군의 귀가시간은 마찬가지로 밤 11시30분이다. 돌아와서는 씻고 간식 조금 먹고 어머니의 스마트폰을 빌려 게임에 열중한다. 스마트폰도 안 사준 A군의 부모는 말리고 싶지만, 게임이 지금 A군의 유일한 낙이자 스트레스 해소책일 것이라 짐작하고 허용해준다. 그나마 오래 할 수도 없다. 다시 학교 과제물 준비하랴 학원 숙제하랴 하다보면 A군은 날이 바뀌어 1시는 넘어야 잠자리에 든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 A군의 생활은 대한민국 모든 일반고 학생들, 아니 고교생들의 평균적인 모습일 것이다. 요즘 학생들 어릴 때 웬만큼 잘 먹여서 다들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A군의 부모는 저렇게 생활해서 체력이 버틸 수 있을까 싶어 “학교 체육시간에 좀 뛰고 구르고 하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렇지도 않다는 답이 돌아온다. 과거에는 체력장이란 것이 있어 악착스럽게라도 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그마저 사라진 지 오래됐고, 운동 제대로 하려면 또 돈 주고 클럽이니 헬스니 다녀야 한다. 지난 겨울방학 때 A군은 친구와 밤 10시30분에 만나 집 부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나 농구를 하곤 했다. 특수목적고에 지원했다 안타깝게도 탈락한 이 친구가 방학 때도 학원 가느라 낮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아예 밤에 만나서 놀기삼아 운동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A군은 고교 생활에 자신도 모르게 적응해가고 있는 듯하다. 중학교 때만 해도 길을 가다가 학원버스를 보면 장난처럼 “아우~, 폭파시켜 버려야 돼”라며 남들 다 가기 때문에 자신도 가야 하는 학원에, 그것을 강요하는 우리사회 교육현실에 반감을 드러내곤 했지만 고교생이 되더니 “뭐 어쩔 수 없다”는 정도의 표정이 된 것이다. 특수목적고니 자율고니 이름부터 본질과 괴리된 채 입시학원으로 전락해 버린 고교도 아닌, 일반고 학생들까지 이렇게 내몰리듯 생활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부모는 아마 양면적인 감정을 가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현실이 그런데 뭘 어떡하겠어, 어떻게든 내 자식이라도 살아남도록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일보가 지난 3일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 ‘위기의 일반고, 공교육이 무너진다’ 시리즈는 그런 부모의 마음에서 시작된 기획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고교 다양화 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결과적으로 특수목적고-자율형사립고-일반고-특성화고로 고교 교육을 서열화해버린 데 대한 비판, 전체 고교의 66%를 차지하는 일반고가 특수목적고나 자율고를 못 가고 낙오한 학생들의 집합소 취급을 받는 현실에 대한 고발, 고민하는 일반고 학생과 교사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연재가 시작된 뒤 고교 학부모회의 등에서 한국일보 지면을 놓고 우려와 토론이 이어지는 등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새 정부의 교육정책은 바로 일반고 문제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일반고와 일반고 학생들의 위기는 지금 우리 교육이 처한 총체적 위기의 반영이다. 무너지는 공교육, 난마 같은 대학입시, 사교육시장 배만 불려주는 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어떤 교육정책이든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그리고 A군, 같은 처지의 B양에게는 안타깝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일단 견뎌라, 때로 반항하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그 생활 속에서도 너만의 보람과 즐거움을 찾아라, 그래야 이긴다, 이겨야 터무니없는 세상도 바꿀 수 있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