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지주사 지배구조가 도입 12년 만에 대대적으로 개편된다. 이와 관련해 개편을 지휘하는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초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금융 행태가 '정치(政治) 금융'이라며 "관치가 없으면 정치가 되는 것이며, 정치가 없으면 호가호위 하는 사람들의 내치가 되는 것이다. 내시들이 하는…"이라고 한 발언에 주목하게 된다.
대형화ㆍ계열화와 함께 관료들의 입김에서 벗어나 스스로 책임경영을 하라는 취지로 2001년 도입된 금융지주회사 제도가 당초 취지와 달리 금융지주사들의 경영이 정치, 내치로 흐르면서, 도입 이전 관치 시절보다 못한 상황에 처했다는 진단이다. 나아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적인 금융 규제 강화 움직임에 발맞춘 당당한 '관치 부활'선언이기도 하다.
신 위원장의 진단은 현 금융회사 지배구조 문제점의 맥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대주주도 아니고, 내부 직원도 아닌 인사가 정권의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수백조원의 자산을 가진 대 금융지주회사를 제왕처럼 운영하는 '정치 금융'은 국가경제 차원에서 매우 위험한 행태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금융기업이 거대화하면서 주주나 채권자도 아닌 소위 전문 경영인이 전권을 행사하는 것이 선진국에서도 일반화했는데, 이들 전문경영인들은 회사의 장기적 전략 마련보다는 자신의 임기 내 가시적 실적을 올리는데 집착하거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행태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이를 '대리인 문제'라고 정의하며, 해결 방안으로 전문경영인을 감시하는 사외이사 제도나 전문경영인과 주주의 이해를 일치시키기 위한 '스톡옵션'을 제시한다. 하지만 거액의 스톡옵션 유혹에 눈이 먼 전문경영인이 주가 부양을 위한 무모한 투자를 감행하거나 회계장부를 위조하다 회사를 한 순간에 공중 분해시킨 사례가 드물지 않다. 또 최근 KB금융지주 경영진과 사외이사 간 갈등에서 보듯 사외이사가 대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또 다른 대리인이 되어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금융지주의 대리인 문제는 '사이비 민영화'에서 비롯됐다. 정부가 공적자금이 투입된 우리금융은 물론 지분이 전혀 없는 KB금융 회장의 임명에도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점에서 외환위기 이후 민영화는 '위장된 관치'에 불과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따라서 신 위원장이 해결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혁이 과거 민영화와 비슷한 수준에 머문다면, 또 다른 낙하산 인사의 정치와 내치가 반복될 뿐이다.
최근 영국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신간이 나왔다. 옥스퍼드대 경영대학원 콜린 메이어 교수의 이 그 책. 메이어 교수는 책에서 대리인 문제가 주주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대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의 근본적 결함이라고 진단한다. 사실 주주가 기업에 직접 기여하는 것은 증자할 때뿐이고 오늘날 상장 기업들의 대다수 주주들은 주식 매매를 통해 단기 차익을 얻으려는 투자자들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주주들은 회사의 먼 장래보다는 흑자 전환이나 이익 급등 같은 단기 호재에 열광한다. 이런 주주들이 선임한 전문경영인이 자신의 연봉과 스톡옵션 가치를 지키려고 분식회계 같은 범죄행위까지 불사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기적 비전과 전문성을 갖추고, 효율성과 함께 국가경제도 함께 고려하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메이어 교수는 기업과 장기적 이해관계가 연결된 이들에게 경영 참여의 기회를 넓혀줄 것을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내부 출신 경영진, 직원, 소비자, 협력업체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이 방안이 너무 이상적이거나 급진적으로 보인다면, 신 위원장의 지적대로 '권력자 눈치를 살피는 정치나 호가호위하는 내치'보다는 관치로 회귀하는 게 지금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부른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금융기관에 대한 관치였음을 잊지 말자.
정영오 경제부 차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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