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일반고 3학년 교실. A양의 머릿속엔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꼼짝없이 잡혀있어야 하는 학교가 지옥 같다. 일찌감치 공부는 포기했고, 노래가 부르고 싶어 직업학교인 아현산업정보학교 실용음악 코스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50명 뽑는데 자그마치 400여명이나 몰렸다는 후문이다. 학교에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A양은 수업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잔다. "학교는 명문대 보내는 데만 관심 있고, 장학금도 성적으로만 줘요. 진학이 목표가 아닌 우리들은 어쩌란 말인가요?" A양은 방과후 월 25만원씩 내고 보컬학원을 다닌다.
옆자리 B군은 오늘도 어김없이 졸고 있다. 성적이 안 돼 특성화고를 지원했다 떨어진 B군은 어쩔 수 없이 이 학교에 왔다. 한번도 제 시간에 맞춰 등교한 적이 없는 B군은 '공부는 안 해도 취업해서 돈을 벌면 되지'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목표조차 없다. B군은 "4년제 대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뿐"이라고 푸념했다.
3월 한 달 동안 열심히 수업을 듣던 C군도 다시 자기 시작했다. 중학교 내신 성적 80%선으로 이 학교에 입학한 C군은 처음부터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도, 공부에 대한 흥미도 없었다. 입시 위주로 돌아가는 학교에서 2년을 어영부영 보냈다. 고3이 된 만큼 공부를 좀 해볼까 싶었지만 역시나 수업을 이해할 수 없었다. D 교사는 "예전에 소위 '뺑뺑이'로 돌릴 때는 학생들의 성적을 고려해 배정을 했지만 고교선택제가 되면서 '진학 실적이 좋고, 세게 가르친다'는 학교에 좋은 학생들이 가고, 진학에 큰 뜻이 없는 학생들이 일반고로 몰렸다"며 "그러면서 일반고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무기력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적어도 일반고의 20~30% 학생들은 직업교육 쪽으로 학교가 방향을 잡아줘야 하는데 일반고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보통의 학생들이 가는 학교였던 일반고가 일순간 '낙오자 집합소'로 탈바꿈했다. 이명박 정부가 시행한 고교다양화 정책으로 국제고와 자사고가 생기고 특성화고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면서 일반고는 우수한 학생들을 앞서 쓸어가고 남은 학생들이 오는 학교가 돼 버렸다. 공부 잘 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는 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고교를 가느냐에 따라 좋은 대학 갈 아이, 졸업 후 취직할 아이가 따로 정해져 있다. 일반고는 어중간한 아이들이 몰린다는 인식이 덧씌워져 있다.
특목고, 자사고 등에 우수학생을 빼앗기고 대입진학 실적 경쟁에 시달리게 된 일반고들은 상위권 학생들만 따로 분리해 가르치는 자구책을 마련한다. 외고에 떨어진 아들을 일반고에 보낸 학부모(41)에 따르면 이 학교는 10개 반 중 2개 반에 상위 20% 학생들을 몰아놓고 가르친다. 문제는 사실상 버려진 나머지 8개 반 학생들이다. 고교 입시 경쟁에서 한번 좌절감을 겪은 뒤 고등학교에 올라와 또 다시 상대적 박탈감에 내몰린다. 이 학부모는 "일반고 지망을 쓸 때 공립고는 모두 제하고, 사립고 위주로만 썼다"며 "사립고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학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일반고 학생들을 휘감고 있는 것은 열패감과 무기력이다. 대학 진학에 뜻을 둔 학생들은 "학교 분위기가 왜 이러냐"고 불만이다. 용인외고에 지원했다 떨어지고 일반고에 진학한 김모(18)군은 "우리 학교 커트라인이 중학교 내신 98%로, 하위 80~90% 애들도 많다"며 "막말로 떨어지는 애들이 많이 오는 학교라 분위기가 별로라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 학교의 경우 중학교 내신 성적이 50% 이내에 드는 학생은 10명 중 2명에 불과하다. 절반 이상은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특성화고보다 커트라인이 낮은 일반고도 많다. 지난 정부가 고졸 취업을 강조하며 특성화고를 집중 지원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정작 고교생 70%가 다니는 일반고에는 별 관심과 지원을 보이지 않아 뒷전으로 내몰린 결과다. 서울 한 일반고의 E 교감은 "학교에는 4~6등급이 많아야 하는데 8~9등급이 많으니 이런 아이들로만 한데 모인 교실 분위기가 어떨지 한번 상상해보라"고 되물었다.
그런가하면 뒤늦게나마 고등학교에서 자기 적성을 찾은 아이들에겐 제대로 된 길을 열어주지 못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일반고 3학년 백모(18)양은 "아무 생각 없이 인문계고에 왔다가 2학년 때 춤으로 진로를 정했는데 춤을 배울 수 있는 예체능반이 없었다"라며 "춤을 배울 수 있는 직업학교도 떨어지고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가야하는데 의욕이 싹 사라졌다"고 털어놨다. 또 "친구가 다니는 한 자사고에서는 예체능 학생들이 성적을 갉아먹는다고 일반고로 전학하라는 압박이 있다고 한다"면서 "일반고는 동네 북이냐"라고 한숨지었다.
대학 진학에 흥미가 없는 많은 학생들에겐 직업교육이라도 시키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마땅치 않다. 강남 지역의 일반고 교감은 "대기업 취직은 꿈도 못 꾸고, 동네 카센터라도 가고 싶다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며 "특성화고에 못 가고 일반고 온 애들은 그런 기술을 배울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일반고 3학년 학생을 위탁해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직업학교가 있지만 서울에는 3군데(서울ㆍ아현ㆍ종로산업정보학교)뿐이고, 경쟁률도 높은 편이다. 종로산업정보학교에서 미용예술을 배우고 있는 최지원(18·성남고)군은 "헤어카달로그를 출판하는 게 꿈"이라며 "컷트와 펌 등 실습을 7교시 동안 계속해도 의미 없이 학교 의자에 앉아있는 것보다 너무 행복하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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