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유전자가 외모나 여러 신체적 특징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는 질병들도 이제 꽤 많이 밝혀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전자의 차이가 약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속속 증명되고 있다. 특히 인종이나 민족 간 유전자의 작은 차이 때문에 약의 효능이나 부작용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에 따라 약을 달리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유전자 때문에 한국인이 유독 주의해서 써야 하는 약들을 소개한다.
유전자 영향 적은 약 개발
피가 굳어지게 하는 혈소판의 기능이 지나치게 활발해지는 것을 막아줘 심근경색 환자에게 흔히 쓰이는 약인 항혈소판제는 한국인에게 상대적으로 효과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대다수 약과 마찬가지로 항혈소판제 역시 몸에 들어가면 간에서 흡수되거나 배출되기 쉬운 형태로 바뀐다. 이런 대사과정은 여러 가지 유전자나 단백질이 조절하는데, 항혈소판제는 간에서 대사되는 중에 특정 단백질의 영향을 받는다. 이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능력에 따라 항혈소판제의 대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인은 절반 이상인 약 51%가 항혈소판제 대사 단백질의 능력을 떨어뜨리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코카시안이나 흑인이 약 30%인데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다. 때문에 클로피도그렐 같은 일부 항혈소판제 성분은 아시아인에게서 효과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한국인의 경우엔 약 49%가 이 약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고 학계에 보고돼 있다.
인종에 따른 이 같은 약효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간 대사에 작용하는 유전자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약이 필요하다. 그래서 최근 개발돼 나온 성분이 티카그렐러다. 간에서 대사과정을 거치면서 형태가 변하는 기존 약과 달리 티카그렐러는 간을 거치지 않고 형태 변화 없이 곧바로 혈소판에 작용한다. 유전자와 관계 없이 인종마다 비슷한 효과를 보이며, 대사과정이 필요 없기 때문에 투약 후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기존 약보다 짧다는 게 입증됐다.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순환기내과 한주용 교수는 "기존 항혈소판제는 환자마다 반응이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돼왔다"며 "티카그렐러의 출시로 기존 약에 잘 반응하지 않던 환자들의 치료나 재발 방지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내비쳤다.
약 얼마나 먹을지도 좌우
환자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용량을 다르게 조절해야 하는 약도 있다. 곰팡이 같은 진균에 감염됐을 때 쓰는 보리코나졸이 한 예다. 보리코나졸을 몸에서 흡수되거나 배출되기 쉬운 형태로 바꾸는 대사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는 20여 가지 형태가 있다. 이 중 대사과정을 잘 일어나게 하는 유전자를 가진 한국인은 약 36%에 불과하다. 대사과정을 그럭저럭 무난하게 진행시키는 유전자는 한국인의 약 47%, 대사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유전자는 약 15%가 갖고 있다. 실제 한국인 497명의 혈액에서 이 유전자를 채취해 형태를 분석해본 결과다.
대사과정을 잘 일어나게 하는 유전자를 가진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환자에게는 보리코나졸의 용량을 4분의 1~2분의 1 정도로 줄일 필요가 있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이런 환자들이 유전자를 고려하지 않고 원래 용량을 복용하면 간이 약 성분을 대사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하다 독성이 쌓이거나 약의 노폐물이 배출되는데 지장이 생기면서 신부전을 앓게 될 가능성이 있다.
바이러스 유전자 따라 내성 달라져
인체에 있는 유전자가 아니라 감염된 병원체의 유전자에 따라서도 약을 썼을 때 나타나는 환자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좋은 예가 B형간염이다. B형간염 바이러스는 유전자형에 따라 a~h의 8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동양인에게는 주로 b, c형 유전자를 가진 바이러스가, 서양인에게는 a, d형이 많이 감염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c형 유전자를 갖고 있는 B형간염 바이러스가 대부분이다.
B형간염 치료제는 반복해서 쓰면 약효가 줄어드는 내성이 생긴다. 그런데 내성이 잘 생기는 약 성분이 감염된 바이러스의 유전자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아시아인과 유럽인 만성 B형간염 환자 1,263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임상연구 결과에 따르면 a, d형 유전자 바이러스가 많은 유럽 환자에선 여러 치료제 중 라미부딘 성분에 대한 내성이 높은데 비해 b, c형 유전자 바이러스가 많은 아시아 환자에게선 아데포비어 성분의 내성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같은 치료제를 써도 지역이나 인종에 따라 부작용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어떤 약을 얼마나 쓸지 선택할 때 지역이나 인종, 환자와 병원체의 유전자까지 모두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 유전자가 약에 대한 반응이나 치료 결과 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약물유전학이 주목받는다. 약물유전隙?앞으로 더 발달하면 개인별 미세한 유전자 차이를 고려해 약효는 높으면서 부작용은 적은 약을 맞춤 처방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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