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현대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원로작가 윤명로(77)와 미국에서 활동하는 원로 조각가 존 배(75)의 개인전이 열린다. 칠순을 훌쩍 넘긴 두 대가가 회화와 설치라는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 '추상의 세계'는 인간정신과 기억의 원형을 보여준다.
6월 23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윤명로 정신의 흔적'전은 그의 60여 년 작품세계를 정리한 대규모 회고전이다. 윤 화백은 "예술의 본질은 '추상'이라고 생각했다. 빈 공간에 최초의 한 획을 던지면 그 공간이 요동치고, 그 요동의 순간과 함께 호흡하면서 맞춰가다 보면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가 작품을 그린 시기의 국내외 정세와 작품의 표현양식을 맞춰보면 자못 흥미롭다. 윤명로의 초기 회화들은 1960년대 한국미술계를 휩쓴 앵포르멜(2차 세계대전 후 고전미술에 반대해 발생한 유럽의 전위미술) 경향을 보인다. 사르트르의 소설 '벽'을 모티프로 한 1959년 작 '벽A', 1963년 작 '회화 M.10' 등에서는 어두운 색채와 두터운 질감이 두드러진다. 1970년대 대표작 '균열', '자' 연작은 물감의 균열현상을 극대화시켜 갈라지고 녹아 내린 자(Ruler)를 통해 독재자(Ruler)에 짓눌린 대중을 풍자했다. 1980년대는 '얼레짓' 연작, 1990년 '익명의 땅' 연작도 각 시대 화두와 새로운 재료의 탐색이 녹아있는 작품들이다. 윤 화백은 "내 그림은 마음대로 형성되는 무질서가 아니라 충분한 사고 끝에 나타나는 정신의 흔적들"이라고 말했다.
2000년 '겸재예찬' 연작은 유화와 쇳가루를 섞어 한 번에 그린 작품들로 겸재 정선의 수묵화를 재현한다. (02)2188-6000.
이달 25일까지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재미작가 존 배의 개인전 '기억의 은신처'는 2008년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설치작품 20여 점을 선보인다. 열두 살이던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27세에 플랫인스티튜트 조각과 최연소 학과장에 올랐던 존 배는 지금도 그곳 명예교수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철사를 이어 붙여 작업하는 그의 작품은 작은 정사각형이나 반원 같은 한 단위에서 시작한다. 정사각형에 또 다른 정사각형을 덧붙이다 보면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고 작품이 완성되는 식이다. 때문에 20대에 조각가가 된 후 줄곧 혼자 모든 작업을 해왔다. 작가는 "매 순간 우연한 결정에 따라 형태가 정해지기 때문에 나 자신도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데 남에게 지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00년대 후반 작품들은 안정된 틀에 약간 변화를 가미시켜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준다. 가느다란 철사를 하나씩 이어 붙여 거미줄 같은 탄력성과 기하학적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가는 "바흐는 단순한 선율에 약간의 변화를 줌으로써 새로운 음악을 만든다. 조각에서도 어떻게 이런 효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며 "이제는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버리고 그 문법을 바꾸는 지점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02)2287-3500.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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