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유약한 아들이 나오는 것은 거의 필연인지도 모른다. 실재의 아버지를 극복함으로써 세계의 질서라는 상징계의 아버지로 이행해가는 라캉식 성장의 과정이 번번이 일단계에서 좌초되고 마는 까닭이다.
19세기 최고의 예술가이자 북학사상 도입에 앞장선 선각적 학자, 정치인으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렸던 추사 김정희(1786~1856). 그런 아버지에게 어떤 아들인들 흔쾌하고 흡족했을까마는, 서얼로 낳은 아들은 특히 위태롭고 걱정스러웠다. 아버지를 동경하고 숭앙할 뿐 스스로 성공할 노력을 하지 않는 것 아닌가. 게다가 그는 엄혹하고 냉정한 성정의 아버지였다.
는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가 서얼 아들에게 들려주는 다섯 가지 인생지침을 담은, 일인칭 서간체 팩션 소설이다. 출판사에서는 '인문실용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지만, 방점은 실용에 가 붙는다. 하지만 우리 고전을 새롭게 풀어쓰는 데 빼어난 장기를 보여온 설흔(45)씨의 유려한 의고체 문장들은 흡사 실제 추사의 글을 읽는 듯한, 실용 너머의 또 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책은 추사가 남긴 서신과 서화에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 씌어졌다. '나'(추사)는 험난한 인생을 뚫고 나아가기 위한 삶과 사람, 사물을 대하는 지혜와 방식을 '너'(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내' 삶의 중요한 장면들을 들추기 시작한다. 추사의 삶을 담담히 서술하는 이 과정에서 그가 정약용, 박제가 등 특별한 인물들과 맺었던 인연과 일화들이 소개되고, 추사의 부성애, 자아성찰,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 등 인간적 면모도 드러난다.
추사의 다섯 가르침은 요약하는 것이 부질없을지도 모르겠다. 위기와 절망에 처했을 때, 두려워 말고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라는 것. 걱정과 불안으로 흔들릴 때면 먼저 해야 할 일의 순서를 기억하고,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의 핵심을 파악하라는, 듣고 나면 누가 모르나 싶은 얘기들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들은 바 있어 안다는 것과 스스로 깨달아 절감했다는 것 사이에는 태평양만큼이나 넓은 차이의 바다가 존재하고 있다. 이 책의 매력은 그러므로 다섯 챕터의 마지막마다 '추신'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된 실용적 지혜에 있지 않다. 문장과 문장의 이어진 고리들을 통해 읽는 이를 자발적 각성의 지점으로 은밀하게 이끌고 가는 묵직한 힘, 그것이 이 책의 고아한 미덕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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