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후반쯤이던가, 김수영의 시를 읽다가 '성인은 처를 적으로 삼았다'라는 구절에서 우뚝 멈춰 선 적이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이던가? 아, 무릇 훌륭한 사람들이란, 아내와 꾸준히 싸우는 어른들을 뜻하는 거로구나. 그렇다면 나도 어여 결혼을 해 격렬하게 아내와 싸워야지. 쉽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 문맥의 뜻을 제대로 살펴볼 생각도 없이 나는 그렇게 해석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삼십 대 중반 결혼을 해서 칠 년 넘게 아내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이상하리만치 싸우지 않는다. 싸우긴커녕 가수 송대관씨가 우리 부부 사이에서 스물네 시간 내내 지치지도 않고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것 마냥 쿵짝쿵짝 박자가 잘 맞는다.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는 것도 쿵짝쿵짝, 적금을 드는 일도 쿵짝쿵짝, 자동차를 사는 것도 쿵짝쿵짝, 아이들 보험을 들거나 할부로 공기청정기를 사는 일도 쿵짝쿵짝. 생각해보니 아내와 내가 싸우지 않는 이유는, 내 성격이 유니세프와 같아서도 아니고, 아내의 성품이 테레사 수녀를 닮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욕망이 엇비슷한 방향으로,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태어나는 것과 발맞추어 닮아갔기 때문이었다. 아내를 적으로 삼다니, 그 무슨 소리. 나는 그저 늘 아내가 고맙고 안쓰럽기만 했다. 그리고 그제야 겨우 김수영이 말한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내와 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일종의 소시민적 욕망에 굴복한다는 뜻일 테고, 가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의미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도, 훌륭한 사람도, 될 수 없는 일은 자명한 사실. 가족이 타인보다 앞에 서 있으니까. 그들 먼저 챙겨야 했으니까.
새 정부 들어 낙마한 사람들의 사유를 거칠게 훑어보니, 대부분 부동산투기와 탈세 등의 이유였다. 짐작하건대, 그들 모두 부부 금실이 좋았을 것이다. 누구 못지않게 가정에선 자상한 아버지이자, 따뜻한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 오욕을 뒤집어써도, 비난을 달게 받아도, 그것이 비윤리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앞만 보면서 쭉쭉 나아갈 수밖에.
문제는 그런 일들이 이제 이쯤에서 그만 멈출 거란 보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욕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의 재산 규모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사람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버지들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형편없는 아버지이자, 무능력한 남편인가를 새삼 깨닫고(아내와 사이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자책에 휩싸이거나, 그 자책을 숨기려 더 심한 욕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책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욕을 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 그러고 난 뒤, 우리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어떤 사건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사실, 이건 책을 읽는 일과 비슷한 상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만큼만 해석한다. 하지만 진짜 독서란, 책을 읽고 자기 자신과 더 멀어지게 되는 일 아니던가). 그러니 쉽게 '아내' 핑계를 대는 것일 터. 김수영이 말한 '처'란 누구인가? 진짜 '처'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자기 자신의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적으로 삼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우리가 낙마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싸워야 할 대상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욕망을 까발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적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자책하거나 욕하는 일보단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김수영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한국에서도 눈이 뒤집힌 사람들/ 틈에 끼여 사는 처와 처들을 본다/ 오 결별의 신호여' 1960년대 지어진 이 시로부터 우리는 아직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적은 더 단단해졌고, 우리들은 그저 욕만 했기 때문이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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