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52), 배찬효(38), 이정웅(31)…. 최근 한두 달 사이 전시회를 가진 이 작가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화상이 아니라 동서양 고전이나 역사적 사건을 패러디하면서 작가 자신을 이 이야기 속 인물로 그린다. 작가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고, 관람객들은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인 셈이다.
다음달 29일까지 수송동 OCI미술관에서 열리는 중견화가 권여현씨의 개인전 '맥거핀'에서는 자신을 유명 회화속 주ㆍ조연으로 패러디한 작품이 나온다. 권씨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의 패러디 작품에서 마르스로, 마그리트의 '위기에 처한 암살자'의 패러디 작품에서 암살에 성공하고 여유를 부리는 남자로 등장한다. 전체 60여 점 중 작가 자신이 나오는 작품이 10여 점에 달하는데, 대개 명작들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다. 권 씨는 "초창기 내 그림이 개인의 내면 표현이었다면, 최근에는 사회에 반영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며 "일종의 역할놀이를 통해서, 나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맞춰져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5월 26일까지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기증 사진 작품전'에서 선보이는 난다의 사진에서는 대량 복제된 작가가 등장한다. 방석 위에서 프랜차이즈 커피 마시는 작가를 복제한 '콩다방', 영화 '화양연화'의 장만옥처럼 분장한 작가가 버스 안을 돌아다니는 '장신운동' 등은 현대사회 아이러니컬한 한 장면을 잡아낸 작품들. 실사와 디지털이 겹친 절묘한 사진은 온라인 캐릭터처럼 변신한 작가가 '쇼'하는 시간을 한 장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6월 삼청동 팔레트서울에서 개인전을 갖는 사진작가 조습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자신을 한국사회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패러디해왔다. 2002년작 '습이를 살려내라'에서는 1987년 시위 도중 사망한 이한열 열사로 등장했고, 2005년작 '물고문'에서는 고문당하는 박종철 열사로 분장했다. 조씨는 "(역사적 사건의) 충돌지점에서 뜻밖에 만나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주체에 대한 이야기"라며 "내 자신을 희화화 하고자 하는 것인데, 진짜 풍자는 대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풍자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달 18일부터 이달 6일까지 신사동 스페이스K에서 열렸던 '셋업(SET UP)'전은 아예 작가 자신을 작품에 등장시킨 작품만 소개했다. 사진작가 배찬효는 헨리 8세의 여자 앤 불린, 동화 속 미녀 등 영국사의 실존인물로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 섰다. 노랗고 울퉁불퉁한 자기 손을 강조하며 찍어 동양남자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작가가 작품에 적극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0~90년대 서구 포스트모던 유행과 맞물리며 시작됐다. 임근준 미술평론가는 "자신을 그리는 것은 '나는 누군가'라는 예술계의 끝없는 화두의 반복"이라면서 "자기자신을 작품 재료로 삼는 작가들은 해외에서 1979년도부터 많이 나왔다. 사회에서 개인으로 화두가 바뀐 포스트모던 유행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강수미 미술평론가는 "조롱이나 풍자를 위해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작가마다 작품에 등장하는 맥락과 방식이 다르다. (작품에 자신이 등장하는 면에서) 국내 1세대인 권여현 작가가 서양 미술사에 개입하는 방식이라면, 배찬효는 서구의 내러티브를 뒤집는 방식으로 자신이 등장한다. 조습이나 옥정호는 사회, 문화 비판적인 관점을 취한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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