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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창의성'의 비창조적 과잉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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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창의성'의 비창조적 과잉사용

입력
2013.03.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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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즐겨 입에 올리는 낱말에도 역사와 흐름이 있다. 어떤 낱말은 시대의 상징과 기호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낱말은 결코 써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되기도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을 강조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지금은 덕성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시대착오적이고 고리타분하다는 평가를 감수해야만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윤리적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더 이상 도덕사회가 아니다. 개인주의가 부인할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부상하면서 도덕경찰이 군림하던 시대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모든 언어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부침을 거듭한다. 어떤 말은 새롭게 떠오르고, 어떤 말은 시대의 파고를 넘지 못한다. 똑같은 낱말이라도 전혀 다르게 이해되고 사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만 외국에서는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도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리더' 또는 '리더십'이라는 낱말이다. 히틀러를 경험한 독일에서 리더는 '독재자'를 그리고 리더십은 '전체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엘리트라는 말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처럼 우리가 쓰는 낱말은 역사적 흐름의 결과 층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물론, 우리에겐 말로써 역사를 시작하려는 경향도 있다. 정치적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의지의 소치이겠지만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낱말을 선호한다.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가장 많이 입에 오른 낱말 중의 하나가 '창조' 또는 '창의성'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경제부흥의 구체적 방법론도 '창조경제'라고 한다. 과학기술과 산업, 문화와 산업을 융합하는 창조경제가 실현되면 새로운 시장도 창조되고, 새로운 일자리도 창조된다는 것이다. 정말, 말처럼 양극화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가 창조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정치인들은 대체로 구체적 실천보다는 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정치 캠페인 전문가들의 의견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너도 나도 좋은 정치적 광고카피를 만드는 데 열심이다. 미래를 창조하는 과학부라는 뜻인지 창조적인 과학을 통해 미래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아리송한 '미래창조과학부'라는 명칭도 요즘 유행하는 '창의성'이라는 낱말에 편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창의성은 요즘 모든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유행어이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의미를 갖고 있더라도 아무런 성과 없이 항상 되풀이되는 단조로운 말에 식상해 한다. 유행처럼 되뇌는 창의성이라는 낱말은 결코 창의적이지 않다. 창의적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창의성이 특별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전해 내려온 습관과 관습에 따라 틀에 박힌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위해 기존의 관습을 깨는 창의성은 항상 파괴적이다.

나는 기존의 제도를 혁신하거나 삶과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지도 않으면서 새로운 낱말로 치장하려고만 드는 모든 것이 정말 싫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와 같은 혁신제품을 내놓은 스티브 잡스가 인문과 기술의 창의적 융합을 강조하니까 덩달아 '융합'과 '창의성'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없는 천박한 문화가 싫다. 강연하면서 창의성을 언급하기만 해도 창의성을 습득할 수 있는 매뉴얼을 내놓으라는 문화적 조급증이 정말 싫다.

창의성이라는 낱말이 시대의 기호로 부상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가 더욱 비창의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우려는 이래서 더욱 깊어진다. 이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창의적이어야 한다고 명령하면, 그리고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창의적이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이 과연 창의적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창의성의 과잉이 그것의 결여 못지않게 창의적 문화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르게 생각하는' 창의성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말보다는 근본을 다질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 않겠는가?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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