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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이 좌절된 꿈을 현실로 재활치료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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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이 좌절된 꿈을 현실로 재활치료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

입력
2013.03.2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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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걷고 싶었다. 출생 직후 닥쳐온 뇌성마비가 걷는 행복을 앗아갔다. 시원한 봄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것은 고사하고 제 힘으로 엄마 품까지 걸어가기도 불가능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다른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그렇게 13년을 살았다.

소녀가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서울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로봇보행치료실에서다. 비록 기계의 힘을 빌었지만 분명히 걸었다. 로봇보행기는 이를 테면 영화 '로보캅'에서 본 로보캅의 아랫도리다. 환자의 넓적다리 윗부분과 무릎 위, 무릎 아래와 발목 위 등을 감싼 채 걷기 동작을 반복한다. 환자가 아무런 힘도 주지 않으면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오른쪽 디딤발에 힘을 줘서 왼쪽 다리를 차 올리면 오른쪽으로 방향이 틀어지는 식이다. 재활훈련 파트너는 가상현실이다. 환자는 대형 모니터 안의 아바타를 조종해 나무와 사나운 개를 피하고 소를 쫓아가며 운동신경을 키운다. 어머니는 30여분 비지땀을 흘리며 걷기 연습을 마치고 기계에서 내려온 딸을 껴안았다. "수고했어, 장하다 우리 딸."

로봇보행기 치료는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병원 재활의학과 김덕용 교수가 보행이 불가능한 환자 76명을 두 군으로 나눠 매주 5일씩 4주간의 치료 효과를 비교한 결과, 로봇보행 치료군의 60.5%가 타인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었다. 평행봉을 잡고 걷기 연습을 하는 일반적인 보행 치료(28.9%)의 두 배가 넘는 성공률이다. 김 교수는 "환자가 걷기 위해서는 수만 번, 수백만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데 이 기계를 사용하면 게임을 하듯 재미를 느끼면서 넘어질 위험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어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한 치료는 재활의학의 많은 부분에 적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편측 무시 치료다. 50대 남성 B씨가 바로 이 경우였다. 뇌경색으로 왼쪽 손과 다리에 마비 증상이 생기자 눈에는 이상이 없는데도 마비된 왼쪽 세상을 인지하지 못했다. 가족이 찾아와도 왼쪽에 서 있으면 알아보지 못하고, 좋아하는 반찬이라도 왼쪽에 있으면 거들떠 보지 않았다. B씨에게는 왼쪽 세상이 없는 셈이었다.

B씨는 3주간 가상현실 치료를 받고 다시 왼쪽 세상에 눈을 떴다. 이 치료는 안경처럼 생긴 HMD(Head Mounted Displayㆍ머리 장착형 디스플레이)를 쓰면 나타나는 가상 공간에서 인지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중앙에 있던 공이 왼쪽으로 갈 때 고개가 따라 움직이면 통과다. 머리의 회전은 HMD에 달린 센서가 인식한다. 만약 5초 정도 지나서도 머리가 공을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빨간색 화살표가 나타나 방향을 알려준다.

여기서 좀더 진화한 것이 강아지 지키기. 횡단보도에 강아지가 앉아 있고, 환자는 버튼을 눌러 왼쪽이나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차를 멈추도록 해야 한다. 현실세계에서 하기 힘든 위험한 상황을 가상현실 속에 구현해 안전하게, 반복해서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김 교수는 "편측 무시 환자들에게 3주간 이 치료를 시행한 결과 70% 이상 증상이 개선됐다"고 말했다.

가상현실 치료는 지금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공간 감각이 떨어지는 외상성 뇌 손상 환자에게는 미로 통과하기, 노화로 지각 능력이 떨어지는 환자에게는 가상 슈퍼마켓에서 장보기 등 아이디어를 가상현실로 구현하는 디자인 능력만 있으면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세계를 만들어 치료를 할 수 있다.

아직 본격적으로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가상현실 속에서 이용자가 어떤 동작이든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도 미국에서 개발됐다. 장갑에 수십 개의 센서를 부착해 손가락과 손의 움직임을 측정할 수 있는 데이터 글로브(Data Glove), 전자기장을 이용해 이용자의 정확한 움직임을 측정하는 장치 등이 이런 시스템을 등장하게 한 원천 기술들이다.

가상현실 치료는 조만간 병원과 가정의 벽도 허물 전망이다. 김 교수는 "환자가 집 컴퓨터를 이용해 가상현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원격재활시스템을 만들고 있다"면서 "병원을 오가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 번거로움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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