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다. 이즈음 대학 캠퍼스는 사람들로 붐빈다. 어딜 가든 13학번 새내기 신입생들이 가득하다. 오랜 영어의 시간을 뚫고 사회로 복귀한 죄수들이 이럴까. 쉴 새 없이 지저귀고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그런데 그들만은 아니다. 사람이 넘쳐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소위, 복학생들, 그들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제대했든,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했든, 전일제 아르바이트에서 파트타임 알바생이 되어 돌아왔든, 그들은 이즈음 대학가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휴학’ 뒤 ‘복학’의 수순을 밟아 지금에 이른 것만은 틀림없다.
말이 복학이지, 그들에게 학교는 이미 옛날의 그 학교가 아니다. 동급생들은 졸업을 했거나 취직을 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친구들은 여러 가지 문제로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다. 나온다 해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토익 공부에 열을 올릴 뿐이다. 후배들은 어떤가. 소 닭 보듯 한다. 존경은커녕 수업 시간의 공동 과제에조차 잘 끼워주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복학생이 끼면 성적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 역시 그들만의 리그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의실 옆 계단참, 지하 학생회관의 동아리 룸, 도서관 뒤 주차장 등은 언제나 그들의 구역이다. 그들은 이 무대 뒤 세트장에 숨어 고작 담배 한 대의 위안에 만족한다. 들뜬 표정으로 눈에서 광채를 내뿜으며 돌아다니던 신입생들은 그들과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마치 좀비를 본 것처럼. 그러니 어쩌겠나. 이 꿈나무들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할 밖에. 그들은 숨을 죽이고, 한 템포 느리게, 몸을 사리며 걷는다.
누가 그들에게서 이십 대의 화사함을 빼앗아 갔나. 그들 역시 한때는 신입생이었다. 세상이 온통 내 것 같았던 순간 역시 없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잠깐 캠퍼스를 떠났다 돌아와 보니 세상이 달라졌다. 무대의 주인공 노릇을 못하게 돼서 서운하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캠퍼스 바깥을 생각하면 도대체가 화사할 수가 없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을 줄 알았는데 세상이 넓어도 할 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세상이 쉽사리 할 일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신입생을 향해 우월감에 가득 찬 냉소를 내비치길 주저하지 않는다. 신입생들의 무지에서 기인하는 생기를 증오하고 무시하는 것은 그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어리고 유치한 짓이다. 교수들에게는 어떤가. 교수야말로 가장 믿을 수 없는 상대다. 하릴없는 희망을 설파하는 교수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당신들은 당신들이 하는 말을 믿는가.
믿지 않는다, 복학생들이여. 믿기 어렵다. 아무 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들도 걱정이고,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냉담한 얼굴로 앉아 있는 너희들도 민망하다. 이 두 그룹을 섞어놓고 취업률 제고 방안 대신 현대사회에서의 문학의 운명과 언어의 기능 따위를 강의해야하는 나의 운명을 믿을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우리의 공통분모,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내 마음을 믿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그런 나에게 공감하는 너희들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고, 세상의 어떤 냉소로도 미처 쫓아낼 수 없는 너희들의 못 다한 문학적 열정과 순수가 믿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먹고 살 걱정에 마음이 졸아들고 졸아들어 결국에는 너희들과 똑같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믿게 되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때때로 강의실에서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게 되는 것. 그 때, 우리의 침묵 사이로 내려앉던 그것은 시간의 힘에 대한 믿음이었을까. 그런 것일까. 얘들아, 안녕. 돌아왔구나. 안녕! 선생은 다만 안녕을 외친다.
신수정 문학평론가ㆍ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신수정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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