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두 통의 인사장을 받았다. 하나는 어머니 장례를 치른 사람이 보낸 ‘인사말씀’, 또 하나는 장관직에서 물러난 분의 인사장이다. 장례를 치른 사람은 이름만 보고도 뭘 보냈는지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장관이 보낸 편지는 그리 급한 일도 아닌데 익일특급, 그러니까 발송 다음날 바로 배달하게 돼 있었다. 내용이야 어찌 됐든 이 두 통의 편지에서 헛된 체면과 허위의식을 읽을 수 있었다.
먼저 장관이 보낸 인사장. 이건 한마디로 종이 낭비, 시간 낭비, 돈 낭비다. 나는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며칠 전에 장관님 인사장을 보내려 한다며 집 주소를 묻는 그 부처 여직원의 전화가 걸려왔었다.
어찌 알았는지 휴대전화로 걸어왔는데, 아무 때나 남의 휴대전화를 울리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그 직원한테야 당연히 장관님이 제일 중요하겠지. 떠나는 분이든 아니든 간에.
그때도 뭘 그런 걸 보내려 하느냐고 그만두시라고 웃으면서 말렸지만, 인사장은 결국 배달됐다. 내용은 빤하다. 부족함이 많은데도 그동안 이런 저런 자리를 맡아 열심히 일했고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 그동안의 소중한 인연(나하고 무슨 인연이 있었지?)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이메일 연락처를 알려왔다.
편지의 작성일은 2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다음날로 돼 있었다. 그러나 장관 청문회와 내각 구성이 늦어지는 바람에 그날 바로 보내지 못하고 이제사 배달을 한 것이다. 30여 년 공직생활을 마감하는 마당에 뭔가 표를 내고 남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취지라면 이메일만 보내도 되지 않나? 전화 걸고 종이 쓰고 우편 배달하는 데 든 돈은 다 낭비다, 낭비. 당연히 자기 돈도 아닐 거고.
장례 인사말씀은 되게 유식하다. ‘時維(시유) 春花之際(춘화지제)에 尊體 錦安(존체 금안)하심을 빌며 삼가 人事(인사) 말씀 올립니다.’ 하고 글이 시작된다. 바야흐로 꽃피는 봄을 맞는 이때 귀하신 몸 편안하시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 다음 “불효자 소생의 모친 장례에 직접 와주신 분과 사정상 오지는 못했지만 조화와 인편을 통해서 간곡한 위로의 말씀과 후한 부의를 베풀어 주신 큰 은혜에 감사 드린다.”는 말이 이어진다. 알기 쉽게 풀어서 소개했을 뿐 이 대목도 쓸 수 있는 말은 모두 다 한자로 돼 있다.
편지에서 가장 어려운 말은 寸楮(촌저)다. “물심양면으로 위로와 격려를 주신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우선은 寸楮로서 감사의 인사 말씀을 드린다.”는 대목에 나온다. 楮는 닥나무를 말하는 글자이고 종이는 닥나무로 만드니 촌저는 짧은 편지, 자기가 보내는 편지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이 대목은 맞춤법도 틀렸다. ‘寸楮로서’는 ‘寸楮로써’라고 해야 맞다.
어쨌든 이렇게 어려운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많을까? 아니 있다면 얼마나 될까? “집안의 대소사 시 꼭 연통을 주시면 고맙겠다.”는 말도 요즘 흔히 쓰는 표현은 아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상주는 평소의 언동으로 미루어 이런 유식한 말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식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 영 다르다.
그는 집안의 장남이니 이렇게 유식한 인사장을 보내기로 결정한 사람도 본인일 것이다. 대체 왜 그랬는지, 잠시 헤까닥 했던 건 아닌지, 누가 써주었는지, 어디서 베껴온 건지 궁금해진다. 다음에 만나면 꼭 인사장을 들고 가 물어보려 한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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