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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시장 등 곳곳에 유쾌한 경건… '神들과의 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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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시장 등 곳곳에 유쾌한 경건… '神들과의 미팅'

입력
2013.03.1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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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달력부터 좀 들여다보자. 재미있다. 빨간색으로 표기된 공휴일들이다.

1월 1일 새해 첫날(당연히), 24일 무함마드 탄생일(그래,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나라지), 2월 10일 임렉(태음력 1월 1일. 우리 구정과 같다. 여기도 화교들이 센가 보군), 3월 12일 녀삐(힌두력 1월 1일), 27일 갈룽안(힌두력의 추석. 조상의 영혼이 집으로 찾아오는 날이란다), 29일 그리스도 수난일(이건 또 뭐지), 4월 6일 꾸닝안(갈룽안 열흘 뒤. 집에 왔던 조상이 천계로 돌아가는 날), 5월 9일 예수 승천일, 25일 석가탄신일, 6월 6일 무함마드 승천일…… 과연, 신들의 섬 발리다.

짤막한 발리 여행에서 굳이 이 나라 달력을 들춰보게 만든 건, 낮과 밤 내내 시끌시끌 들떠 있는 거리의 축제 분위기였다. 그제(12일)는 힌두력(사카)의 설날인 녀삐. 발리에선 연중 최대의 명절이다. 인도네시아는 인민의 다수가 무슬림인 나라지만, 발리에서만큼은 90% 가까이 힌두교를 믿는다. 다른 섬에선 하루 쉬는 녀삐가 발리에선 사흘 연휴다. 그 연휴의 앞쪽 언저리에 발리를 찾아간 건 행운이기도 했고 불운이기도 했다. 어쨌든, 요즘 '신들의 섬, 발리'에선 신들이나 사람들이나 무척 부산했다.

숙소인 호텔은 발리 섬의 남쪽 끝 누사두아 해변에 있었다. 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는 렌터카 운전기사에게 가달라고 부탁한 곳은 섬의 북쪽 산악지역인 낀따마니. 남에서 북으로, 바다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나중에 들은 일인데 힌두교에선 하계(下界)에서 상계(上界)로 가는 상징 같은 것이라고 했다. 발리 사람들은 악마와 나쁜 영혼들이 바다에 산다고 믿는다. 반대로 최고봉 아궁산(3,142m)을 비롯한 북쪽 산간 지대는 신들과 자연의 영혼이 사는 집이다. 사용 가능한 한국어 보캐블러리가 100개 남짓한 기사와의 대화에서 그 까닭까지 캐낼 순 없었다.

추측하건데 이런 연유가 아닐까. 인도네시아가 이슬람화한 것은 15세기. 자바 섬의 몰락한 힌두교 왕족과 승려들은 발리로 피신했다. 그들이 현재 발리인의 뿌리다. 피신한 뒤에도 무슬림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인지 발리인은 바닷가에 마을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비워둔 해변이 20세기 후반 세계적 휴양지로 개발됐단 사실을, 지금도 젖가슴을 드러내고 다니는 섬의 노인들은 신의 축복으로 여길지, 악마의 소행으로 여길지 적잖이 궁금했다. 해변엔 달러와 서핑 보드를 든 쾌활한 악마, 혹은 천사들이 득시글거렸다.

낀따마니로 가는 도로는 꽉꽉 막혔다. 길이 좁기도 했지만, 명절을 맞이하는 왁자함으로 도로가 붐볐다. 낯선 언어의 활기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차에서 내려 걸으려는데 운전기사가 당부했다. "발, 조심해요." 인파에 발 밟히지 말라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짜낭을 밟지 말라는 얘기였다. 발리 사람들은 하루 세 번, 자신이 모시는 신들에게 작은 제물을 바친다. 손바닥만 한 바나나 잎사귀에 음식과 꽃, 동전 따위를 넣은 것으로 짜낭이라고 부른다. 짜낭은 어디에나 있었다. 탑 위에, 문 앞에, 다니는 길에, 숲에, 개울에, 시장 좌판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모든 대상 앞에 발리 사람들은 경건해질 수 있는 듯했다.

바투안이라는 이름의 마을을 지나는데 멀리 두 가닥의 멋진 벤쪼르(대나무로 길게 늘어지게 만든 장식)가 눈에 들어왔다. 가보니 11세기 지었다는 푸세 사원이다. 아는 것 없는 눈에도 조각의 수준이 범상찮아 보였다. 들어가려면 사롱(남녀 구분 없이 허리에 둘러 입는 옷)을 입어야 했다. 입장료는 따로 없고 불전함처럼 생긴 기부함이 있었다. 운전기사의 몫까지 1달러짜리 두어 장 접어 넣었다. "헉, 이건…" "네, 개입니다." 힌두교도는 육식을 멀리한다고 알았는데, 발리 힌두교와는 관계 없는 얘기였다. 발리 사람들은 소, 돼지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단다. 사원에서 날 놀라게 만든 것은 녀삐 제물로 개를 잡아 껍질을 벗기는 풍경이었다.

발리의 힌두 사원은 좌우로 갈라진 대칭형의 뾰족한 문(찬디 븐타르)을 갖고 있다. 산과 바다가 선과 악을 각각 상징하듯, 찬디 븐타르의 오른쪽과 왼쪽도 그렇다. 들어갈 때는 오른쪽이 삶과 광명, 왼쪽이 죽음과 어둠인데 나올 때는 좌우가 반대가 되므로 들어갈 때의 선이 악, 악이 선이 된다. 선과 악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사원 안엔 조각이 화려한 석탑 파두락사, 수미산을 표현한 메루 등의 볼거리가 많지만, 북동쪽 구석에 있는 작은 탑이 가장 중요하다. 아궁산이 있는 북쪽, 해가 뜨는 동쪽의 중간에 세우는 밧마사나라는 탑으로 우주의 원리를 나타낸다.

관광 중심지인 우붓을 벗어나자 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사람과 마을도 뜸해지고 차에도 속도가 붙었다. 손목시계에 내장된 고도계 숫자가 1,000m를 넘어서자 에어컨을 꺼도 덥지 않았다. 플랜테이션 농장 지대를 지나서 더 달리니 최근 화산분출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뚜렷한 바뚜르산(1,717m)과 바뚜르 호수, 멀리 이곳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아궁산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장엄했다. 원체 신이 많은 힌두교 나라인데다 신격(神格)의 커트라인이 한층 더 낮은 발리이지만, 굳이 신들의 위계를 매기자면 발리의 자연을 제일 윗자리에 둬야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쪽 바닷가와 달리 바뚜르 호숫가엔 외국인은 뜸했고 대부분 현지인들이었다. 명절 연휴를 맞아 가족끼리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때때옷인 듯한 새하얀 차림의 얼굴엔 이방인의 기준으로 가늠할 수 없는 여유와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살림이 윤택한지, 무슬림 정부가 그들에게 관대한지, 힌두의 신들이 그들에게 여전히 친절한지 알 길은 없었으나, 발리인들의 명절은 사람들의 표정만으로 명절다웠다. "마리 메나남 하라판 바루(새로운 희망을 심읍시다)!" 발리의 새해 인사는 그랬다.

여행수첩●대한항공과 가루다인도네시아항공이 인천-발리 직항 노선을 매일 운항 중이다. 아시아나항공도 7월 중 주2회 취항 예정. 가루다인도네시아항공은 발리행 이코노미클래스(3~9월 출발) 발권 고객에게 편도 15만원, 왕복 30만원의 추가 비용을 받고 비즈니스클래스로 업그레이드 해주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02)773-2092 ●발리에는 대중교통이 거의 전무하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현지인들의 수익 보호를 위해서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현지인 가이드가 400여명 있다. 가이드 겸 운전사 포함 차량대여비 하루 50~80달러 수준. 호텔이나 리조트에 요청하면 연결해준다.

발리(인도네시아)=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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