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구(78) 화봉문고 대표는 지금까지 10만권의 고서(古書)를 모은 알아주는 수집가다. '죽을 각오로' 책 수집에 뛰어든 그가 올해는 화봉문고 50주년을 맞아 대규모 전시를 기획했다. 3월부터 8월까지 매달 여섯번 '한국의 고서 1-6'을 통해 3,000점의 수집품을 선보일 계획인데, 그 첫 전시 '책으로 보는 단군오천년'이 지난 5일부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화봉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태종이 1401년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뒤, 태조가 개국공신 47명을 선정해 좌명공신 호칭을 내리고 포상한 기록을 담은 '좌명공신녹권'(佐命功臣錄券) 필사본과 정조가 경서에서 좋은 문장을 골라 편집한 '어정제권(御定諸圈)' 필사본 등 진귀한 자료들이 일반에 첫 공개됐다.
여 대표는 12일 갤러리에서 "인생의 마지막 굿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1963년 한국 최초로 브리태니커를 들여오는 등 외국 서적ㆍ잡지 수입상으로 큰 돈을 벌었던 그는 늘 지식에 목말랐다. 13남매 중 셋째로 몸이 아픈 형과 시집 갈 누나를 대신해 동생들을 줄줄이 책임져야 했던 탓에 시를 쓰고 싶었던 문학청년은 대학도 마치지 못하고 사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대학 들어가기 전에 신문로에서 고서점을 하던 친척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게 인연이 돼 책 사업을 하고 또 책을 모았을까 싶네요."
정보가 귀하던 시절 지인 두명에게서 투자금 40만원을 모아 외국 학술잡지ㆍ서적 수입상을 시작한 그는 외국 서적을 독점 수입하다시피 할 정도로 사업수완이 좋아 큰 돈을 벌었다. 그러다 82년에 주최한 '서울북페어'에서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을 들고 온 사람에 끌려 고서수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때 '진달래꽃'을 포함해서 200권을 450만원에 샀어요. 바로 북페어에 '한국 문학작품 초판본 전시회'를 하나 더 기획했는데 사람이 말도 못하게 많이 찾았어요. 전시가 끝나고 이걸 경매에 붙여 팔려고 했는데 1,000만원을 치르고 사겠다는 데가 생기더군요. 그런데 경매 바로 전날 신문사 문화부장들과 저녁 자리에서 누가 '그걸 뭘 파냐, 문학박물관을 하나 만들지' 툭 던지더라고요. '이게 팔 일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문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그는 바로 경매를 무산시키고 다음날부터 문학박물관을 건립 작업에 착수했다. 여 대표는 "시인이 못 된 한 때문이었나 보다"고 회고했다.
문학 작품만 모으려던 것이 견물생심으로 하나 둘 늘었다.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해 있을 때도 수집벽은 멈추지 않았다. "80년대에 사업을 확장하다가 한참 어려울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부도가 날 상황에서도 욕심나는 책이 나오면 꼭 그걸 사야 해요. 당장 돈을 메워야 하는데 그 돈으로 고서를 샀어요. 수집가들은 다 미치광이에요. 우리끼리는 블랙홀에 빠졌다거나, 출구 없는 고속도로를 달린다고들 표현하죠."
사업하는 사람이 목숨을 걸 정도로 고서 수입에 빠져 팔지도 못하는 헌 책을 계속 모으다 보니 광화문 한복판 알짜배기 땅에 있던 빌딩을 두 채나 팔아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책은 남지 않았냐"며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는 고서를 수집하려면 돈과, 진가를 알아보는 안목, 고서를 찾아 다닐 시간 등 세가지 요소에다 '운'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인연이 없이 와 닿는 건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닌 건 손에 잡아도 금방 나가요. 고물이 다 그렇겠지만 고서 역시 영물이죠. 전광석화처럼 나타났다 없어지는데 그때를 잡지 못하면 영영 놓치게 되죠." 미당의 초판 역시 인사동에서 점심을 먹고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구했다. 정지용이 추사의 글씨를 모사해 '궁발거사 화사집'이라고 표지 글씨를 쓴 희귀본으로 딱 15부가 있었는데, 그 중 3호라고 기록되어 있는 미당의 소장본이다.
한평생 모은 책이지만 그는 지금이라도 국립 책 박물관이 생기면 미련 없이 기부하겠다고 한다. "조건 없이 기증하겠다는 데도 자꾸 중앙도서관에다 하래요. 먼지 쌓여서 도서관 한쪽 구석에나 있겠죠. 그걸 왜 해요. 책은 박물관에 가야 펄럭이는 겁니다. 세계 큰 박물관은 다 그래요. 학자나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꾸 책을 찾아보도록 박물관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2003년 화봉책박물관을 개관하고 2008년에 화봉갤러리를 열어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이번 전시도 그런 작업의 연장선이다. 앞으로 '한국의 고활자' '한국 문학작품 산책' '한국 교과서의 역사' '고문서 이야기' '무속사상, 그리고 불경ㆍ성경ㆍ도교ㆍ동학 자료' 등 6개 전시를 통해 자신의 보물들을 차례로 공개할 계획이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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