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는 독일과 이스라엘에 '괴링'은 악몽 같은 성(姓)이다. 나치 정권 2인자로 학살을 주도한 헤르만 괴링 때문이다. 하지만 동생 알버트 괴링은 형과 달리 당시 괴링이라는 성이 지닌 힘을 이용해 많은 유대인을 구했다는 사실이 최근 자세히 알려졌다.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한 공적을 인정해 이스라엘이 수여하는 명예 지위인 '국가의 의인' 후보로 알버트가 추천될 예정이어서 심사 결과가 주목된다고 독일 주간 슈피겔이 7일 보도했다.
알버트의 사연이 처음 알려진 것은 50여년 전인 1962년이다. 오스트리아의 시나리오 작가 에른스트 노이바흐가 한 주간지에 자신이 "알버트에게 빚을 진 유대인"이라고 밝히는 글을 기고했다. 나치가 점령한 오스트리아 빈의 한 상점에서 나치군이 노이바흐의 75세 된 노모에게 '더러운 유대인'이라는 팻말을 건 채 쇼윈도에 앉게 했는데 이를 본 알버트가 괴링가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으로 그녀를 풀어줬다는 것이다.
사료에 따르면 알버트는 나치에 반대해 독일을 떠난 뒤 오스트리아 국적을 얻었고 유대인을 해외로 도피시켰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알버트는 자신이 체코 무기 공장 고위직을 맡았을 때 레지스탕스들이 무기를 빼돌리는 것까지 눈감아줬다. 그가 전후 미군에 항복해 재판 받았을 때 스스로 도움을 줬다고 회고한 '괴링 리스트'에 거론된 유대인만 34명이다.
하지만 알버트는 괴링이라는 성 때문에 수십년간 묻혀 있었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과거를 숨기는데 급급했던 독일에서 괴링은 금기어였고 역사가조차 알버트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1998년 영국 채널4에서 노이바흐의 기고를 토대로 만든 다큐멘터리가 방영됐고 이 다큐멘터리를 본 오스트리아인 윌리엄 버크가 그의 행적을 쫓으면서 알버트의 이름은 겨우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버크는 조사 결과를 지난해 라는 책으로 펴냈다.
하지만 괴링이라는 성은 전후 알버트에게 족쇄가 됐다. 미군 재판에 회부됐을 때 누구도 알버트가 유대인을 구했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조사관이 괴링 리스트에 포함된 유명 오페라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 아내의 친척이었던 덕분에 알버트는 겨우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후에도 알버트는 괴링이라는 성으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아내가 외동딸과 떠난 후 알버트는 1966년 뮌헨에서 쓸쓸히 죽었다.
'국가의 의인' 후보자를 선정하는 이스라엘의 야드 바??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알버트를 심의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최종 심사단인 10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위원회에 넘길 것"이라고 밝혔다. 1953년 '국가의 의인'이 제정된 후 지금까지 명예 지위를 얻은 사람은 47개국 2만4,356명이며 이중 독일인은 510명이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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