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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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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의 서재

입력
2013.03.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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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원룸에는 600권 정도의 책이 책장에 꽂혀 있다. '책을 수집한다'고 말하기엔 민망한 숫자이긴 하나, 서울에서 세입자로 살면서 들고 다니기엔 충분히 부담스러운 숫자요 무게다. 서울에서 세입자의 삶은 '잦은 이사'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은가. 가장 최근의 이사를 하면서 나는 내가 이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만큼 책을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내 취향과 관심을 반영하는 나만의 서재를 꿈꿨지만, 지금 방에 있는 책들을 유지하려는 건 단순히 낭만이나 허영 때문만은 아니다. 온갖 잡다한 영역에 대해 글을 쓰는 자유기고가로서, 나에겐 글을 쓰다가 한 영역에 대한 지식을 즉각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온갖 영역의 책들이 몸 주변에 있는 것이 편하다. 읽어본 책이라면 당장의 글쓰기에 필요한 지식을 기억에 의해 소환하고 그 기억의 근원이 되는 책을 펼쳐 순식간에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도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펼쳐보면 해당 분야에 대한 대략의 '개념'을 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빈 공간은 인터넷 검색과 주변인의 조언으로 채워나가게 된다.

물론 이는 도서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겠으나,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영역이나 주제가 아니라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취급하는 자유기고가의 입장에서는 집에서 하는 게 더 효율이 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만일 당신이 매체에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입장이 된다면 몇몇 출판사에선 신간을 보내올 것이다. 영 생계가 어려울 때는 그것들을 중고서적에 가서 팔아치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다고 돈이 많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출판사에 미안하니 대개는 책장에 꽂아두기 마련이다. 그렇게 책들은 점점 더 늘어만 간다.

이렇게 살다간 순식간에 600권이 1,000권이 될 것 같아 방안을 모색해봤다. 트위터를 통해 들어온 충고는 '북스캔'을 떠서 책은 버리고 내용은 PDF파일로 저장해서 컴퓨터나 아이패드로 보관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충고라고 생각했다. 그럴 경우 검색이 훨씬 용이하니, 읽었지만 출처가 기억나지 않은 정보나 읽지 않은 책의 관련 정보를 훨씬 더 신속하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많았던지, 최근 북스캔 업체들이 성업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더 문의해보다 보니 결국엔 저작권 문제가 걸렸다. 북스캔 업체들은 사실상 저작권법을 교묘하게 피해서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저작권법상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 건 본인이 집에서 자신이 구입한 책을 스캔 떠서 자기 혼자만 볼 경우에 한정된다고 한다. 업체들 중 일부는 스캔파일에 스캔을 문의한 이의 성명과 전화번호를 박고, 결코 외부에 유출하지 않을 것을 다짐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런다고 저작권법을 피할 수는 없다. 사적 호기심으로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처럼 이 문제에 대한 검색을 해보다 보니 2011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북스캔을 '저작권 위반'으로 결론 내렸고, 최근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스캐너와 사진기를 현행법상 복사기기의 범위로 포함시켜 사실상 북스캔을 처벌할 수 있는 저작권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파일을 유포해서 돈을 벌겠다는 의도 따위는 물론 없었지만 그래도 정치인에게 훈수를 두는 글을 쓰기도 하는 글쟁이가 저작권법까지 위반하는 건 아닐 것 같아서 '서재 간소화 프로젝트'는 이쯤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스캐너로 자기 시간을 써서 북스캔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꽤나 형편이 괜찮은 사람일 거다. 그리고 만일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굳이 북스캔을 하지 않고 지금보다 그럴듯한 서재를 만들려는 허영을 품었을 거다. 나무 베어서 생기는 환경파괴가 더 클지 '웹화'를 위한 전기소모량 증대로 인한 환경파괴가 더 클지도 알기 힘든 상황이니 말이다.

결국 '부자가 아니라서' 찾아본 대안이, '부자가 아니라면' 위법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 셈이다. 인생사가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직접 겪는 입장에선 또 한번 한숨지을 수밖에 없다.

한윤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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