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면 속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대선 과정에선 공정한 경제 환경과 국민 통합을 부르짖지만 결과적으론 구두선으로 그치는 게 다반사였던 탓이다.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정권들은 슬로건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신자유주의 노선의 연장선에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나같이 대기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으로 양극화를 키웠고 갈등과 분열을 증폭시키는 편중 인사로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돼 사회적 갈등이 누적되다 보니 이젠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지경이 됐다. 복지 확대를 통해 성장의 과실을 제대로 나누는 경제민주화의 실현과 이념ㆍ계층ㆍ지역ㆍ세대를 아우르는 탕평책은 더 이상 회피하기 어려운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같은 시대적 과제를 엄중히 인식하는 듯 했다. 보수 정당의 후보면서도 진보적 의제인 '경제민주화'와 '사회통합'을 과감히 내세웠기 때문이다.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다짐도 수 없이 했다.
그는 지난해 7월 대선 출마 선언에서 '국민행복을 위한 3대 과제' 중 첫 번째로 경제민주화를 꼽았다. 대선 공약집에는 경제민주화라는 표현이 9번이나 등장한다. 같은 해 8월 후보 수락 연설에선 "국민 대통합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고, 다음날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국민대통합과 탕평책을 꾸준히 역설하며 국민통합특별위원회까지 만들었다. 과반수의 국민이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그의 실천 의지가 퇴색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정부 5년의 비전을 담은 5대 국정목표에서 제외됐고, 그 자리를 '경제부흥'과 '창조경제', '한강의 기적'이 대신했다. 측근들은 "표현만 안됐을 뿐 약속한 경제민주화 정책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사회 각계에 경제민주화가 성장의 하위 개념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경제 분야 국정과제를 정리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 1ㆍ2분과 간사들이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관료 출신인데다 새 정부 경제부총리 역시 대표적 성장론자인 것도 경제민주화 후퇴론에 힘을 보태는 요인이다. 재계가 조만간 경제민주화 정책 입법 저지를 위한 조직적인 로비에 나설 것이며, 국회가 관련 입법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조각 인선도 대통합, 대탕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첫 인선 작품인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와 특정 학교 및 지역에 편중된 내각 인선 등으로 국민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극우 논객 윤창중의 거듭된 대변인 임명은 '불통과 독선' 이미지를 굳혀줬고, 박정희 정권에 기여했던 인사들의 2세 중용이나 경직된 안보관을 지닌 국방장관과 공안검사 출신의 법무장관 내정은 구시대로의 회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육사 출신의 안보라인 독점을 놓고는 여권 내부에서조차 "군사정권이 부활한 것 같다"는 우려가 크다. 그 어느 때보다 개혁 의지가 요구되는 정권 출범 초기에 체제 수호에 적극적인 고시 출신 관료와 검찰, 군 등 보수인사들을 대거 배치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상명하복과 보신에 철저한 이들이 경제민주화와 사회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뒷받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지향점은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초심으로 돌아가 시대적 과제를 다시 고민해보기 바란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국정운영의 동력도 확보할 수 있다. 해답은 분명하다. 복지와 고용의 선순환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확보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뛰어넘는 소통의 리더십을 구축하는 일이다. 5년 단임 정권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3년 정도다. 나머지 2년은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기에도 바쁘다. 정권의 힘이 빠져 새로운 정책을 할래야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불통과 고집, 인사 난맥상을 보자면 마치 10년, 20년 장기 집권하는 정부로 착각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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