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그 말도 참 익숙한 박근혜 대통령께서, 취임사에서 ‘한강의 기적’과 ‘국민행복’을 수차례 입에 올렸다. 뭔가 꺼림하고 또 어색하다. 우선 ‘한강의 기적’은 한국 정치사와 여성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새 대통령이 택한 수사치고는 너무 낡은 것이다. 오래 오용된 ‘한강의 기적’은 IMF 경제위기 이후에는 죽은 비유가 된 줄 알았다. 더구나 우리가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 1970, 80년대식 고도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객관적인 진단이 아닌가. 낡은 수사법은 박 대통령의 정치적 자원이 자기스스로가 아니라 사거한 부모에게, 또한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정치에 기반하고 있으며, 역사의식과 콘텐츠에 문제가 있다는 의심을 환기시킨다. 새 대통령이 부디 ‘한강의 기적’을 자신의 리더십을 표상하는 수사나 언어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한강의 기적=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라는 데에 허구적인 신화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은 월남전 참전과 한일국교정상화 이전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또 70년대 고도경제성장의 기적은 한강변 뿐 아니라 일본ㆍ타이완ㆍ싱가포르ㆍ홍콩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니 이런 건 문외한이 보기에도, 한강만의 ‘기적’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 역내 경제 성장의 효과에 국내적 요인이 보태진 결과라 불러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만약 ‘한강의 기적’의 진짜 국내요인과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수천만의 60~80년대 노동자ㆍ농민이다. 그 시대의 고도경제성장은 순전히 피눈물 나는 그들의 노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노동자ㆍ농민은 일방적인 저임금과 착취구조를,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디며 기계처럼 일했다. 이미 70년에 전태일이 다 알려준 바이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고난과 성적ㆍ경제적 불평등도 ‘성장’의 동력과 엉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와중에 독하게 저축했다. 그 저축이 경제적 축적의 기반이 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밤낮으로 줄기차게 공부했다. 이 모두를 이끈 게 박 전 대통령의 리더십인가? 전혀 믿을 수 없는 스토리 아닌가.
과연 한강의 기적 시대가 ‘국민 행복’ 시대였을까. 89년에 연세대 의대 이호영·신승철 교수팀은 65년부터 88년까지 치안본부가 집계한 총21만6,374명의 자살기록을 토대로 분석한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에 있어서 자살률의 추이’란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 한 손으로 독재의 광기어린 칼을 휘두르고 다른 한손으로 중공업 중심 근대화를 밀어붙인 바로 유신시대에 자살률이 엄청나게 높았다. 73년에는 자살률이 27.61명이었고 75년에는 31.8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아진 이명박 시대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한강의 기적이 한편으론 ‘인간의 피’를 동력으로 했음을, 그리고 고도경제성장=국민행복이 아님을 확인해주는 수치다.
따라서 ‘박정희의 리더십= 한강의 기적’이라는 생각은 맹목적인 경제주의와 일국사관, 그리고 반민중적 엘리트사관에 기초한 것이다. 이제 새 대통령이 불가능한 신화를 재활용할 태세이니, 한강의 기적 담론은 잘못된 과거를 고쳐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부 국민들의 심리적 퇴행과 고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담론을 은근히 찬성하거나 조장해온 지식인들도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릴 때가 아닌가 싶다. ‘독재는 나빴지만 경제는 잘 했다’는 식의 모호하고 유보적인 태도가, 오늘날 정치 현실의 정신적 배경 아닌가. 그런 태도는 곧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임에 다름 아니다.
‘한강의 기적’과 ‘국민행복’이 100% 모순 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한강의 기적 시대와 같은 국민 동원과 민의 희생이 다시 강요될 수는 없다. 그런데 새 대통령은 진짜 아름다운 말도 했다. “임기 내에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 이 말이 현실이 되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겠다. 한강의 기적과 국민행복 담론의 모순도 이를 통해서만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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