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가 삼일째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아파트 건너 동에서. 홀로 외롭게. 저 집 주인은 아침에는 삼일절이라는 걸 기억하고 저녁에는 까먹었나 보다. 덕분에 나는 삼일절의 삼일째, 삼일절의 태극기를 생각하고 있다.
한때는 나도 아버지와 함께 삼일절 아침 꼬박꼬박 태극기를 걸던 시절이 있었다. 그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린 건 학교를 떠돌던 꺼림칙한 소문이었다. "삼일절에 태극기를 안 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 "밤 12시에 유관순이 찾아와 귓속에 속삭인대.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그 나이라 해서 괜히 지어낸 말이란 걸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깨끗이 무시해 버릴 만큼 간이 크지도 않았다. 빛이 잘 들지 않는 복도 게시판에 내내 걸려 있던 유관순의 으스스한 초상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 굳은 얼굴 앞에서 우리는 온갖 괴담을 나눴다. "유관순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래. 저 사진, 반쪽씩 가리고 봐봐." "밤에는 피눈물을 흘린다던대?" "너무 많이 알면 안 돼. 유관순의 진실 백가지를 다 알면 유관순이 앞에 나타나. 그 눈을 보면 죽는대."
아, 꽃다운 나이에 고문 받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유관순은 어쩌다 무서운 귀신이 되어 지상을 떠돌게 된 걸까. 유관순을 위인과 열사로 받들면서 우리는 오히려 그녀를 외롭게 한 건 아닐까. 아니면 이 괴담들을 통해서야말로 유관순은 엄숙한 애국의 틀에서 걸어 나와 소녀로서의 영혼을 활짝 피운 것이려나.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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