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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외면하고 영혼을 거덜내며… 마귀가 돼버린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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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외면하고 영혼을 거덜내며… 마귀가 돼버린 가족

입력
2013.03.0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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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과로사로 몰락한 가족큰아들이 몸 부서뜨리며 번 돈으로 잔인한 평온 이어가다 필연적 파국자신의 대표작 갱신한 안보윤"폭력 5부작은 이쯤에서 끝내고 극단적 사랑 그린 연애소설 써볼 것"

이것은 존재의 파쇄에 관한 이야기다. 거대한 파국이 가져다 주는 숭고함도, 한 순간의 파멸이 가져다 주는 비장함도 여기에는 없다. 문서절삭기에 쑤셔 박힌 정산 후 영수증처럼, 존재를 갈기갈기 찢고 짓이겨 마침내 거덜 내고 마는 멸렬하고도 무심한 폭력. 그 폭력의 연원을 따라가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것이 어긋나고 교착된 사랑이어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끝내 '질주하는 슬픔'과의 마라톤이 된다.

은 일상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 야기하는 비극에 천착해온 젊은 작가 안보윤(32)이 다섯 번째 선보이는 장편소설이다. 스물 다섯에 처음 쓴 장편 로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해, 네 해 뒤인 2009년 로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연거푸 수상한 이 저력의 작가는 한 해 만에 새로 펴낸 이번 소설로 자신의 대표작을 갱신했다.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가 주인공이었던 전작들에 비해, 인물의 감정과 심리로 이야기를 밀고 가는 새 소설은 보험사기와 근친살해라는 거친 소재를 섬세하게 세공해 내는 솜씨가 발군이다. 자극적 줄거리를 이어가면서도 거의 개연성을 잃는 법이 없는 것은 아마도 소설 속 인물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려 한 그의 문학적인 절치부심의 결실일 것이다.

'어떤 이는 운이 나빠 살인자의 가족이 된다. 어떤 이는 더더욱 운이 나빠 피살자의 가족이 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살인자의 가족인 동시에 피살자의 가족이 되기도 한다.'(20쪽) 소설은 엄마를 죽인 형으로 인해 '불투명하고 더럽고 역겨운 모든 것을 얻은' 동생 인호와 그의 문제적 형 인근이 주인공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과로사로 순식간에 단란한 중산층의 세계로부터 퇴거 당한 이 유가족은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이모가 살고 있는 P시로 숨어든다. 먹고 살길 막막한 세 모자는 실은 '보험금 수령 설계사'인 이모의 제안으로 보험사기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이 생계형 보험 활극의 주인공으로는, 암묵적 합의 하에, 사려 깊고 똑똑한 영재였던 형 인근이 낙점된다.

인근이 은근한 꾀임 혹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염좌 골절 골절 염좌 염좌 복통을 반복하며 생계비를 조달하는 동안 인호는 엄마의 따스한 보살핌을 받으며 책가방을 사고 급식비를 내고 중학교에 진학한다. 어머니가 체납고지서를 식탁에 두고 고치처럼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우면 인근은 유령처럼 어딘가로 빠져나가 자기를 부서뜨린다. 형이 '나는 내일, 발가락이 부러지거나 어깨가 탈골될 예정이라 누구와도 긴밀해질 수 없었다. 내 생활은 공유가 불가능했고, 모두함께다같이가 사라진 세계였고 다음에내일또가 금지된, 세계였다'고 체념하며 홀로 부서져간 덕분에, 동생은 지긋지긋한 P시를 벗어나 대학에 진학한다.

이 폭력서사의 비극은 큰 아들을 살림 밑천 삼는 것 말고는 살 방도를 궁리하지 못한 나약한 엄마와 그 엄마가 '한 명쯤은 제대로 살아야 되지 않겠니'라고 여기는 작은 아들이 인근의 공공연한 비밀을 모르는 척하는 데서 비롯된다. '나는 쉽게 풀어졌다, 여기저기 흘린 나를 줍느라, 흩어진 몸을 이어 붙이느라 급급해 나는 내가 누더기가 된 줄, 도 몰랐다.'(173쪽) 인근은 '죽음의 깊이와 삶의 두께가 비례'하는 사춘기 시절을 보내며 객귀가 되지만, 인호는 '그것들의 결말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고 더 이상 아무것도 목격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안온한 무지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불안한 평화를 도모하는 일에는 필경 시한이 존재한다. 마귀 역을 맡은 여덟 살의 인호가 연등축제에서 울 때 너는 마귀가 아니라며 안아주었던 동네 누나 문정은 10여 년 뒤 말한다. '정정할게. 너는, 마귀야. 너랑 네 엄마는 분명히 마귀야."(233쪽)

두 형제가 번갈아 화자로 나서는 교차서술은 각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내상을 효과적으로 들여다보는 내시경의 역할을 한다. 동생 인호가 이야기의 전반을 끌고 나가는 소설의 주요 서술자 역할을 맡았다면, 형 인근은 고백이라는 증폭장치를 통해 영혼이 파괴되는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극단까지 치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에는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자아가 산산이 흩어진 인근이 모친을 살해하는 순간, 어머니와의 물리적 거리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손을 쭉 뻗으면 겨우 닿을 만큼 멀었다, 가까웠다, 몸을 굽히면 턱이 부딪칠 만큼 가까웠다, 멀었다' 같은 말을 읊조릴 때, 이 정신분열자의 언어는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가 바로 시라는 사실까지 환기시킨다.

그리 길지 않은 창작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인상적인 장편소설을 써낼 수 있었던 비결을 작가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의 "집요한 성격"과 함께 "다양한 菅갠湧?등장시켜 길게 다뤄줘야 설득력 있는 주제들에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을 이유로 꼽았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작가는 "폭력 5부작은 이쯤에서 끝내고 앞으로 극단에까지 이른 사랑을 그린 연애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안보윤은 이번 소설로 자신이 장편 쓰기에 필요한 탄탄한 문학적 근육을 지녔음을 유감 없이 증명해냈다.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이 강렬하고 매혹적인 장편소설은 그가 앞으로 한국 문학에서 한몫할 존재가 될 것이라는 흐뭇한 예감마저 들게 한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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