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미에 공감하는 삶과 화가의 죽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미에 공감하는 삶과 화가의 죽음

입력
2013.02.28 12:00
0 0

이두식(1947~2013). 그 이름의 앞이나 뒤에 '한국의 추상화가' 또는 '홍익대 회화과 교수' 같은 칭호가 자연스럽고 친숙하지, 결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뜻하는 '고'자를 붙일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고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만 하는 이. 30여년 넘게 한국 미술계의 독보적인 화가로서 밝고 화려한 색채와 유기적인 구성의 '한국형 서정 추상'을 이끌어낸 이. 그런 그가 지난 23일 오전 향년 66세에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비보에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소식을 들은 이들 대부분은 슬픔에 빠지기에 앞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고 극히 놀랐으며 황망해했다. 고인과 가까웠던 학계 및 미술계 사람들은 바로 전날 홍익대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두식과 표현·색·추상'전에서 평소처럼 그와 축하의 인사를 나눴던 터라 그랬다. 자신의 그림들 앞에서 작품 의도를 설명하고, 허물없이 관객과 사진을 찍고, 영예로운 정년퇴직 후 시작될 제 2의 화가 인생에 기대를 표하던 고인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한 터라 더 그랬다.

그런데 소식이 전해진 지 약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는 인터넷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고인의 이름이 오른 것을 보았다. 누가,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높게 고인에 대해 관심을 표했던 것일까? 물론 여러 가지 추측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보여주는 바는 이두식이라는 화가가 한국현대미술에서 어떤 고유한 대표성을 갖는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성이 비단 미술계 전문가들의 내부 평가를 넘어, 지금 여기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미술을 알고 있고 애호한다는 사실로부터 얻어졌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의 그는 자신만의 회화 양식을 구축한 화가인 동시에 다작의 화가였으며, 엘리트 미술의 권위를 고집하는 대신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미술가였다. 1990년대 이후 그의 그림이 여기저기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데 문제를 지적한 이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고인의 미술이 동시대 우리의 미적 감수성 안에 '이두식'이라는 고유명사로 자리한 것도 사실이다. 급작스런 비보에 놀라 인터넷으로 고인을 검색했을 다수를 떠올리며 나는 이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미학을 되새겼다.

"미는 그 역사적 현존에 따라 볼 때 이전에 감탄했던 사람들에 가담하라는 호소다. 미에 감동한다는 것은, 로마인들이 죽음을 그렇게 일컬었듯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ad plues ire)' 향한다는 뜻이다." 독일 현대미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렇게 미를, 그리고 미에 감동하는 일을 죽음과 결부시켜 정의했다. 다소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미와 죽음을 하나로 연관시켜 그가 말하고자 했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풀이하자면 죽음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존재조건인 것처럼 미 또한 사람들을 묶는 어떤 공통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미의 공통성은 일종의 '호소'로서 세대와 세대를 잇고, '감동'이라는 경로를 통해 역사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예컨대 어린아이가 따로 배우거나 훈련한 적도 없는데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그래왔던 것처럼 꽃을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경우가 그에 부합한다. 아이에게 꽃의 아름다움이 시간의 차이를 넘어, 개인의 취향에 앞서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무릇 꽃만이 아니다. 우리가 '좋은 작품'이라는 애매한 말로 표현하는 예술작품들, 그 가치를 인정하고 기꺼이 감동하는 많은 미적 대상들이 모두 그 같은 힘을 갖고 있다.

화가 이두식의 작품 또한 그러한 힘으로 고인의 죽음 너머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의 그림에 한결같은 호화로운 색채, 역동적인 필선, 과감한 여백은 화가가 앞서 살았던 이들의 호소에 공감한 결과인 동시에 새롭게 살아갈 이들에게 보내는 아름다움에의 호소이기 때문이다.

강수미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미술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