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온 지 한 달째다. 마흔의 노총각 소설가가 무슨 사춘기 가출소년 마냥 큰 트렁크를 자동차에 싣고 돌아다닌 지 한 달이 지났다. 겨울에 집 나왔는데, 벌써 봄이다. 그 사이 여기저기 흘러 다니며 단편소설을 하나 썼고, 세 개의 고정 꼭지 칼럼을 비롯해서 여러 개의 산문을 카페나, 풍광 좋은 바닷가 민박집에서 썼다. 그렇게 흘러 다니다 보니 지금, 제주의 봄 앞에 앉았다. 서울은 춥다는데, 제주는 지난 주말부터 완연한 봄의 품이다. 유채꽃이 언제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게 존재를 과시하고, 바다 위에 부서지는 봄빛의 화려함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진정이 되지 않을 만큼 눈부시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스러워질 때는 트렁크 가득 들어있는 겨울옷이 무색해서이다. 트렁크 가득 쌓여가는 빨랫감을 볼 때뿐이다.
배에 차를 싣고 제주로 들어오며 아주 오래 전, 목포에서 배를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주를 오며 배를 탔던 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가 유일했다. 20년도 더 훌쩍 지나버린 세월이 별안간 뒤로 밀리는 물보라에 뒤섞여 심정이 복잡해졌다. 친했던 몇몇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고, 뿌연 이미지만 남긴 채 대부분 망각의 저편에 자리 잡은 이들도 언뜻 떠올랐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이다. 꿈에서 멀어진 시간이 오래도록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막막하고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며 이제껏 젊은 한 시절을 곰곰도 해보았던 것이다.
제주는 실로 여러 번이지만, 올 때마다 언제나 새롭다. 구석구석 아직도 숨겨진 맛집을 찾아내는 일도 쏠쏠한 재미를 주고, 바다를 등지고 서서 오래도록 한라산이 품고 있는 아늑함을 바라보는 것도 제법 운치 있다. 그러면서 눈을 감고 아름다운 섬엔 아름다운 일만 가득하리라, 바람을 봄볕에 섞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보름 전, 제주에 온 이유는 조금 특별했다. 풍광 좋은 곳에 방을 잡고 밀린 원고를 털어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지만, 그보다 더 스페셜하고 의미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해 말부터 작가들이 모여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제주 강정마을을 평화의 도서관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생명과 평화의 섬이 무장되는 것을 책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취지였다. 작가들이 제안한 '강정평화 책마을'이 지향하는 것은 도서관 건물 하나를 짓고 책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부수고 짓는' 개발의 방식이 아니라 돌담, 대문, 빈방, 창고, 포구, 정자, 당산나무, 빈터, 공원, 버스정류장 등 마을의 다양한 공간들을 활용해서 도서관을 만들어보자 하는 것이었다. 강정마을이 본래 지닌 마을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살려내고 그 아름다움에 책을 통한 평화의 내용을 공존시키고자 하는 취지였다. 현재 412명이나 되는 많은 작가가 동참의사를 밝혔다.
겨울 내, 대선을 거치면서 증폭된 이슈에 모든 국민의 눈과 귀가 몰려 있을 때, 작가들은 조용히 평화의 섬을 평화롭게 만들고자 저서에 사인을 하고, 후원금을 보내고, 소장하고 있는 책을 포장해서 강정마을로 보냈다. 갑자기 직면한 봄의 첫걸음, 작가들의 소중한 정성이 작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강정마을에 412명의 작가들의 뜻을 담아 '평화책방'을 내게 된 것이다. 마을에 들어설지도 모를 군 위락시설에 대한 방어기제로써 아름다운 마을을 문화와 책으로 지켜보고자 하는 작가들의 의지인 것이다. '평화책방'은 작가들이 기증한 저서와 기증한 책으로 채워지는 것은 물론이다. 감히 말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이 될 것이다. '평화책방'은 강정마을을 지나는 모든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책방 안에서, 돌담 밑에서, 한가로운 정자에서, 강정천에 발을 담그며 책과 차를 마시며 쉬고 가게 하리라, 하는 작가들의 마음을 담은 공간, 쉼터이다. 그들이 읽는 것은 평화일 것이고, 그들이 마시는 것은 생명이 되리라 작가들은 믿는다. 책은 공존과 소통의 상징이 아니던가. '강정평화 책마을' 평화와 생명의 전초기지로써의 '평화책방'은 3월초에 문을 연다. 제주로 봄을 찾아 가는 모든 분들, 강정 '평화책방'에서 차 한 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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