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6일이제." 지나가다 그냥 툭 물어봤는데 밭에서 일하던 아저씨는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거금대교가 개통된 날이다. 그날 다리 놓이고 면적 육십이 정보, 인구 오천사백 명의 대한민국 열 번째 큰 섬이 육지가 됐다. 그래서 거금도를 차 타고 갔다. 광주에서 화순 넘어가는 너릿재부터 시원하게 뚫린 길 따라 과속 좀 해서 한 시간 삼십 분 걸렸다(길을 지나치게 널찍이 뚫어놔서 과속할 수밖에 없다). 고흥반도 무르팍에 붙은 거금도는 이제 "참말로 가차운" 곳이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면 산림 풍경 너른 곳/ 만자천홍 그림병풍 앵가접무 좋은 풍류/ 세월 간 줄얼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일러라…'(판소리 단가 '이산 저산')
어느 지방엘 가나 요샌 스토리텔링이라고 해서 이야기 한 자락 걸쳐 놓는 게 기본이다. 이곳 거금도는 박치기 왕 김일이 주인공이다. 호랑이, 갓, 곰방대 그려진 가운 입고 팔척 장신 외국인 선수들을 박치기 한방에 퍽퍽 쓰러뜨리던 프로레슬링의 전설 김일의 고향이 거금도다. 팔도강산 두루 지지리 궁상이던 시절, 국민들에게 우람한 자신감을 안겨줬던 그를 낮추잡을 생각이 전혀 없으나, 거금도에서 김일보다 먼저 챙겼으면 싶은 인물이 있다. 판소리 명창 동초 김연수(1907~1974)가 그다.
판소리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동초가 고저청탁(高低淸濁)이 분명한 아니리와 정확한 너름새로 당대 으뜸으로 꼽힌 명창이었다는 사실, 동편제의 호탕함과 서편제의 애잔함을 섞은 동초제라는 산맥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거금도에 그의 흔적은 희미하다. 조선 땅 남녘과 동녘의 바닷가 마을이 으레 그랬듯, 거금도도 무업(巫業)이 성한 곳이었다. 동초는 세습무 집안 자식이었다. 무업이 성했던 곳은 현대에 들어와 무업에 대한 멸시도 심했던 곳이라서, 타지에 썼던 동초의 묘를 고향인 거금도로 옮겨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위에 앞 토막의 몇 마디를 적어 놓는 단가 '이산 저산'은 동초가 죽기 전에 즐겨 부른 노래다. 기념관 크게 세워진 김일과 달리 거금도에서 그나마 동초와 관련지어 가볼 만한 곳은 월포리의 월포문굿농악전수관 정도. 찾아간 날,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방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설하고. 늦은 눈에 도로가 다시 질퍽해진 지난 주 거금도로 간 건, 굳이 이유를 대자면 이제 좀 제대로 된 봄볕을 보고 싶어서다. 지도를 펴고 국토의 남쪽 자락을 훑는데 거금도가 눈에 들어왔다. 해토머리 아직 딴딴한 땅이 녹으려면 더 기다려야겠지만, 바다야 어디 얼어붙었던 적이 있었다던가. 그러나 거금대교 건너 닿은 섬엔 아직 봄이 멀어 보였다. 고흥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섬의 북쪽 개펄엔 겨울 바다농사인 매생이 양식도 끝나기 전이다.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면사무소 지나 익금해수욕장 쪽으로 차를 돌렸다. 아, 그런데 거기 남쪽에, 눈부신 봄볕이 바다 가득 찰랑이고 있었다.
흰색과 푸른색 사이 어디쯤에 있는 그 바다의 빛깔을 포착할 낱말을 알지 못한다. 바다는 빛과 물의 입자로 된 거대한 점묘화 같았다. 정오 무렵이어서 태양빛은 12시 방향에서 튀어 올랐는데, 검게 보여야 할, 멀리 시산도의 실루엣도 푸르스름한 빛으로 환했다. 우수 지나 경칩으로 기우는 황도면을 미끄러지며 태양이 부린 조화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으나, 남녘 바다에서 그것은 축복이라 해야 할 만큼 탐스러운 봄볕이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놓고 가드레일을 딛고 올라서서 한참 해바라기를 했다. 꾸덕꾸덕했던 몸의 세포들이 말라 포슬포슬해지는 것 같았다.
"이거? 미역이제. 쫄쫄이미역. 요샌 볕이 좋아서 사흘이면 이렇게 말라부러."
둥기둥기 봄볕에 취해 느긋이 차를 몰다가 길가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어민들과 마주쳤다. 호미로 말린 미역 다듬는 손들이다. 거금도는 여름엔 다시마, 겨울엔 미역 양식으로 사철 바쁘다. 바다에 패치워크처럼 짙은 푸른색으로 흩어져 있는 것은 미역 양식장이었다. 익금리 사는 정종수(68)씨는 "거금도 미역은 양념할 것도 없이 끓이기만 해도 국이 된다"며 "이게 일본에 수출까지 하는 상품 미역"이라고 자랑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거금도는 김 생산지로 유명했다. 하지만 대규모 시설을 갖춘 다른 지역에 밀려 지금 김은 거의 접었다. 비슷한 시기, 섬의 주된 밭작물도 소주 담그던 고구마에서 뭍에 내다 파는 양파로 바뀌었다고 했다.
멀칭비닐 구멍으로 양파순이 파릇한 들을 지나 산으로 올랐다. 금산면(錦山面)의 면소재지인 거금도는 섬 전체가 산(금산)인 셈이어서, 섬 가운데 솟은 산(592m)은 적대산이 아니라 적대봉이라고 불린다. 그다지 높지 않지만 해안 마을에서 출발할 경우 해발 0m부터 산행을 시작하는 셈이니 오르는 거리가 꽤 된다. 산기슭은 조선시대 이웃 소록도, 절제도, 시산도, 나로도와 함께 도양목장에 속한 목장지였다. 제주도에서 서울 가던 말들이 여기서서 쉬며 살을 찌웠다. 돌로 쌓은 목장성이 폐허로 남아 있는데 말은 없고 염소만 돌무더기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다. 360도 파노라마 바다 조망대다.
봉수대에 오르니 해남 두륜산, 영암 월출산, 여수 돌산도, 멀리 거문도까지 한 바퀴로 펼쳐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그리 깊지 않은 날이었는데도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붕붕거리는 전세버스가 파상재 고갯길로 줄지어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정상을 디딘 등산객들은 대부분 득량만이 있는 북쪽보다 다도해가 아득한 남쪽으로 시선을 뒀다. 선글라스 없인 눈이 부실 법도 한데, 그 딱따글거리는 봄볕이 모두들 마냥 반가운 듯한 얼굴이었다.
여행수첩
●서울에서 가려면 호남고속도로-익산포항고속도로-순천완주고속도로를 차례로 갈아타는 편이 제일 낫다. 이후 영암순천고속도로로 고흥까지 갈 수 있지만 현재 고흥IC 진출로가 공사 중이라 벌교IC로 나가야 한다. 27번국도가 연륙교로 거금도 오천항까지 이어져 있다.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몇 곳 있으나 연륙교 이어진 뒤 개발이 되레 더딘 편이다. 다리 건너 육지의 녹동항에 괜찮은 시설이 모여 있다. 녹동항에서 제주도나 거문도, 완도 등으로 가는 카페리를 탈 수 있다. 남해고속 (061)842-6111 평화해운 (061)843-2300 ●오천리 청석마을에 2011년 거금도 생태숲이 조성됐다. 후박나무, 아팝나무 등 난대 식물의 자생군락지를 탐방할 수 있다. 생태숲에서 적대봉으로 이어진 등산 코스도 있다. 고흥군 문화관광과 (061)830-5347
고흥=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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