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이었던가 2004년이었던가, 가는 해를 하루 남긴 12월30일 밤 여운 선생 등 4명의 송년회 자리였다. 눈보라가 정강이까지 잠길 정도로 퍼부었다. 1차를 마치고 늘 가던 소굴 같은 2차 자리로 이동하려는데 택시가 잡히질 않았다. 그 눈길에 택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무리는 인근 커피숍에서 일단 눈을 피하고, 그 중 연배가 낮은 내가 밖에서 30여분을 헤매도 택시를 잡을 수 없었다. "무슨 기자가 택시도 하나 못 잡아." 여운 선생은 또 난데없이 예의 기자 타박을 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곧 택시가 왔다. "어떻게 된 거요?" "해피콜이야. 해피콜 몰라? 장애인을 도울 수 있는 택시야." 그때는 "아무튼, 전시도 안 하는 잊혀진 화가가 아는 건 많아. 이럴 땐 도움도 되네" 하고 웃으며 무심코 넘어갔다.
어제 여운 선생의 부고를 들었다. 선생이 재직했던 대학 교수의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뜨는 순간 설마, 했지만 선생이 오후 6시쯤 운명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모습을 뵌 게 그러면 석 달여 전인 셈이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스르고, 후배 기자가 쓴 선생의 부고를 읽으면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에서 이사로 활동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도 앞장섰다'는 구절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때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랬구나, 선생이 해피콜을 알았던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그를 십년 넘게 알아왔는데 전혀 몰랐던 그의 면모가 또 있었구나.
여운 선생은 그런 사람이었다. 스스로 푼수를 자처하며 사람좋은 걸로 선배들 후배들 가림막이 돼주면서, 앞자리는 양보하고 뒤에서 걱정하며 남몰래 돌봐주던 사람이었다. 딸 결혼시키면서 그렇게 수맣은 지인들에게 청첩도 하지 않았고, 수십년 마신 술 탓에 암에 걸리고 난 후에도 결코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처음 그를 알았을 무렵 어느날 점심에 만나 취재를 한 후 "딱 한 잔만 더하지", "오랜만에 이제하 선배 카페 가서 한 잔 더할까", "퇴근하고 나와, 회사 앞에 있을게", "인사동 가서 입가심은 해야지" 하는 그에게 이끌려 대여섯번 자리를 옮겨다녔을 때는 그가 자칭했듯 '알중'(알코올중독)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를 만나갈수록 그것은 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속이 유난히 깊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사동 밥집에 앉아있으면 하루저녁에 적어도 십수명은 알은 체를 하는 그를 사람들은 마당발이니 알중이니 불렀지만 그것은 그의 겉모습일 뿐이었다.
1980년대 우리 문화운동의 큰 축이었던 민족미술인협회 창립 주역의 한 사람인 여운 선생은 가끔 술이 얼큰해지면 2000년대 이후 인사동 혹은 한국 문화판의 분위기를 황성옛터라고 불렀다. 물론 그의 고유한 비유는 아니었지만, 그는 세월과 함께 변해가는 우리 문화계를 안타까워하고 쓸쓸해 했다. 그 비유처럼 노쇠해지고 맥빠지고 권력과 자본에 치여 역사의 뒷전에서 주저주저하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 문화의 모습 같다.
여운 선생이 운명하기 이틀 전에는 그와 홍익대 동기이기도 한 화가 이두식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을 전후해 태어나 한국 현대사와 동시에 성장하면서 오랜 가난과 전쟁과 독재와 폭압, 짧은 풍요를 모두 경험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맨손으로 우리 문화를 일궜던 사람들이 이제 이렇게 하나둘 스러지고 있다. 그들의 뒷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문화융성을 3대 국정 방향으로 제시한 것은 반갑지만 그 문화라는 것이 혹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문화, 우리 정신의 깊이를 더하기보다는 당장 돈벌이가 되는 콘텐츠를 지칭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덧없이 떠난 여운 선생의 영전에 생전에 좋아하시던 맥주 한 잔, 그를 만나면 읊조리곤 하던 이백의 시 구절과 함께 삼가 바쳐 올린다. 今人不見古時月이나(금인불견고시월ㆍ지금의 사람은 옛 달을 보지 못하였으나) 今月曾經照古人이라(금월증경조고인ㆍ저 달은 일찍이 옛 사람을 비추었으리)… 月光長照金樽裡하라(월광장조금준리ㆍ달빛이여 길이 술통을 비추어 다오).
하종오 부국장겸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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