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남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이 "두 얼굴의 과학자"라며 조동호(57) 한국과학기술원(KAIST) ICC(정보통신 융합 캠퍼스)부총장을 추천했다.
1970년대 중반 우리 세대의 대학 생활은 입학 직후부터 이른바 '스펙 쌓기'에 열중해야 하는 지금 같지 않았다. 젊은 치기와 고민, 낭만을 마음껏 뿜어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대학 캠퍼스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유독 학구적인 친구들이 있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75학번 동기들을 '놀던 그룹'과 '모범생 그룹'으로 나눈다면 난 전자에, 조동호 KAIST ICC부총장(무선전력전송연구센터장ㆍ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은 후자에 속했다. 그러니 같은 과였어도 대학 시절 우린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한참을 놀다 정신을 차리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박사학위를 받고 첫 직장으로 ETRI를 택해 1996년 귀국한 나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과학자들에게 ETRI가 빌려주는 아파트에 가족과 함께 입주했다. 당시 그 아파트 단지 안에는 KAIST의 교수 아파트도 있었는데, 우연인지 인연인지 조 부총장이 옆에 살았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는 어느새 정보통신 분야에서 촉망 받는 교수로 성장해 있었다.
우리의 관심사는 비슷했다. 조 부총장이 정보통신부가 지원하는 이동통신 분야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으면서부턴 우리 연구단과 서로 의논할 일도 잦아졌다. 당시 나는 ETRI 임베디드소프트웨어연구단에서 일하며 휴대용 이동통신 단말기의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구축해나갔다. 조 부총장과 상의하며 개발한 초기 플랫폼 기술은 지금의 아이폰 운영체제나 안드로이드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놀던 물이 달랐던 동창과 뒤늦게 한 배를 탄 셈이다.
조 부총장과 함께 일하면서 학창시절 내가 봤던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KAIST가 개발하고 외국에 수출한 온라인 전기자동차(도로에 전기공급장치를 깔아 주행 중에도 무선으로 충전할 수 있게 한 자동차) 기술은 조 부총장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를 정부에서 수백억 원을 지원 받는 대형 프로젝트로 키운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비현실적인 기술에 섣불리 투자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조 부총장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확신이 있었고, 그걸 논할 때는 구체적, 논리적 근거를 대며 열변을 토했다. 평소엔 다소 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이지만, 연구에 대해서만은 어느 누구보다 주관이 뚜렷하고 강한 사람이다. 정반대의 두 얼굴을 가진 과학자라고 할까. 온라인 전기자동차는 분명 어렵고 도전적인 연구다. 이런 연구는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설사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을 결과물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조 부총장에게서 전수 받은 노하우를 갖고 우리도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해 올해부터 시작했다. 이름 하여 '기가코리아'다. 휴대폰으로 1초당 1기가비트(Gbps)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도록 관련 기술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려는 범부처 차세대 정보통신 프로젝트다. 완성되면 휴대폰의 데이터 전송 속도가 지금보다 10배는 더 빨라질 것이다.
과학자의 눈에는 자신이 하는 연구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해 보인다. 빨리 앞서가야 하는데 주변에서 자꾸 태클을 걸면 안타까우면서도 조급해진다. 이럴 때 새겨야 할 말이 역지사지(易地思之)다. 반대하는 과학자들도 분명 이유가 있고, 그걸 잘 이해하면 오히려 상대방을 더 잘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이디어를 현실로 일궈가는 과정에서 옛 친구도 이런 고민을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정리=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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