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30대 유신시대에 정계에 진출,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를 거치며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선거와 정책 등 정치적 주요 국면을 이끌며 보수의 브레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진영에 섰을 때 세간의 평가는 찬사와 성토로 극명하게 갈렸고, 문 캠프 내에서도 불편해하는 반응이 없지 않았다.
그는 방송 찬조연설에서 자신의 선택을 '이념적 가로지르기'로 표현하며, 문 후보에게서 받은 좋은 인상과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선택의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설명이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이달 초 서울 중구의 한 찻집에서 만난 윤여준(74)씨는 스스로를 "어떤 이념에도 구애 받지 않고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그의 이름 뒤에 옛 직함을 달지 않기로 했다.
문 후보 지지 결심의 배경을 다시 듣고 싶다
"처음에는 어디든 대선 캠프에 간다는 생각을 안 했다. 찬조연설에서도 말했듯이 문재인씨를 만나보니 합리적이고 개방적이고 이념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 같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사람이니까 이럴 때 한번 이념의 경계를 넘어가자고 생각했다. 오해 받고 욕은 좀 먹을지 모르지만 그걸 무릅쓰고 경계를 넘어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다음 사람들은 부담이 훨씬 덜할 테니까. 욕을 먹고 안 먹고 보다 무엇으로 욕을 먹느냐가 중요하다. 신념이 있으면 욕 먹어도 하는 게 당당한 것 아닌가. 한국 사회에서 이념의 경계를 허무는데 도움이 된다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비판이 많았는데
"양쪽으로부터 환영 못 받을 건 예상했다. 그래서 의미 있는 것이다. 소신이 그러면 그쪽으로 가야지 욕먹을까 봐 안가는 건 비겁하다. 뭘 기대하고 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떳떳했다. 욕 먹는 건 개의치 않는다. 무엇으로 욕을 먹느냐가 중요하다. 신념이 있으면 욕 먹어도 하는 게 당당한 것 아닌가."
정치인의 진영 이동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크다.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오가는 경우가 워낙 많았다. 그런 걸 많이 봐왔기 때문에 국민들도 막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체험을 통해 그런 선입견이 생긴 거니까 국민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중할 필요가 있다. 선입견으로 얼른 욕하고 싶지만 과거하고 다른 게 있는지 따져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신의 결정을 이념적 가로지르기라고 표현했는데.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구실이다. 보수의 가치가 뭔지 의식도 별로 없다. 진보도 그런 면이 많다. 특히 정치세력이 그렇다. 자기들한테 생사가 걸린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국가나 국민을 위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해외 학자들은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이데올로기 시대는 끝났고 생활정치 시대가 왔다고 했다. 실제 정치도 삶의 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우리 국민들도, 분단체제 때문에 늦긴 했지만, 2000년 16대 총선부터 이념보다 민생을 돌보는 정치를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정치권이 외면했다."
진영을 옮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분들의 말만 들어서는 안 되고 살아온 삶을 봐야 한다. 평소에 그런 가치를 얘기한 일이 있는지, 그 가치에 맞게 살아왔는지. 가령 정운찬 전 총리의 경우 동반성장의 뜻을 함께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지원한다고 늘 말하지 않았나. 그래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을 것이다. 보수는 동반성장이 못 마땅한가. 정 전 총리가 박근혜 후보를 지원했으면 훌륭하다고 했을 것 아닌가. 어떤 기준으로 배신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거침 없던 그의 어조는 과거의 선택들에 대한 설명을 청하자 신중해졌다.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 1977년 박정희 정권 때 공직에 입문한 그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을 거치며 청와대와 정부에서 일했고, 2002년 대선 등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핵심 전략가로 활약했다.
어떻게 정부에 발을 들여놓게 됐나.
"유신시대 정치부 기자로 지내면서 회의가 많았다. 그러다 신문사가 mbc로 넘어갔는데 새 경영진이 기자들에게 근무복을 입으라고, 어기면 징계한다고 하더라. 그 때 결심했다. 가족도 있는데 갈 곳이 마땅찮아 고민하던 차에 정부에 있던 언론계 선배가 해외공보관 자리를 제안하더라. 국내에서 이 꼴 저 꼴 보기도 싫고 당시엔 기자나 관리나 별 차이도 없어 보이더라. 영어라도 익히고 바깥세상을 보는 것이 더 도전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저서()에서 역대 정권에 대해 비판한 대목도 많더라.
"갈등이 많았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만두고 나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 생활인으로서 책임도 있고, 두려우니까. '가족이 있으니까'라는 자기합리화의 구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따지고 보면 용기의 문제다. 독립운동이나 민주?운동을 한 사람들도 가족이 있었지만 자기 신념을 위해서 몸을 던졌다. 그러자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들들에겐 가급적 그렇게 살라고, 못하더라도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 리스펙트(존경심)를 가져야 한다고 얘기한 일이 있다."
찬조연설에서 밝힌 그 부채의식인가?
"그렇다. 난 민주화에 빚이 있는 사람이다. 기여한 것 없이 누리기만 했으니까. 이번에 문재인씨를 만나서 이 사람을 통해서 얼마간 빚을 갚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하지만 대선 전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윤씨 영입에 대해 던진 비판- "전향의 과정 없이 덜컥 끌어들이다니"-에 대해서는 발끈했다. "전향은 무슨. 내가 죽을 죄를 지었나. 상대방을 적으로 보는 것은 화석처럼 굳은 진영의식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 보수 어떻게 보나.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것은 북한과 미국에 대한 태도다. 원래 유럽에서 나온 보수와 한국 보수가 무슨 관계가 있나. 보수세력은 도덕적 권위를 거의 상실하다시피 해서 젊은 사람들한테 외면당하고, 잘못한 것도 있는데 인정하지 않는다. 그 결과 지난 60년의 헤게모니가 약화한 것 아닌가. 과거 헤게모니를 쥔 세력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국가주의 반공주의 성장주의인데 그걸로는 지금 안 된다. 변하지 않아서 보수가 아니고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해야 보수다. 솔잎이 늘 푸른 이유도 안 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잎을 바꿔서 그런 것이다. 진보도 진보가 아니다. 진보가 존중하는 게 개인의 인권과 환경 같은 가치인데 북한 인권에 대해 말을 안 한다. 진보는 진보대로 권위가 없다."
한국 정치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수가 보수다워지고 진보가 진보다워지면 싸움이 아닌 경쟁이 가능해진다. 어느 가치 와 방법이 나라를 더 발전시키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것이 진보와 보수다. 경쟁은 공존을 전제로 한다. 모순이 없는 이념이나 제도는 없다. 그런데 지금은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사생결단하듯이 하니까 문제다. 합리성은 논리의 완결성이고 타당성은 현실 적합성이다. 합리성과 타당성이 있으면 진보 가치건 보수의 가치건 쓰면 된다."
이념대결 구도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의 역할은.
"생활정치를 요구해야 한다. 생활정치로 가면 진보와 보수가 죽고 살기로 싸울 일이 없어진다. 생활정치를 도외시하고 이념만 떠드는 정치인을 국민이 심판하면 정치인들이 그렇게 못한다. 결국 민주주의란, 지도자란, 국민 수준과 나란히 간다. 잘못 선출해 놓고 정치인 욕만 하는 건 무책임한 것 아닌가. 궁극적으론 유권자에게로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선거 후 민주당 세미나에도 인수위 간담회에도 참여했다. 대화하자는 자리면 상대가 누구든 진영이 어디든 구애 받지 않는다고 했다.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며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의 기억을 다시 들췄다. "비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속에서 고개를 드니까 괴로웠다. 세월이 지난 후에 그럼 후회를 했는가? 글쎄…, 어쩔 수 없었다고 자꾸 자기합리화를 하게 된다. 그래서 자식들한테는 가능한 한 그런 경우를 당하면 가치를 따라가는 게 옳다는 얘기를 한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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