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진영 이동과 '변절' 논란은 정치 선진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양상은 한국과 상대적으로 다르다. 정치적 입장 변화의 배경과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고, 노선을 바꾼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활발하다.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은 고집과 뚝심의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는 소속 당에서 두 번이나 등을 돌렸다. '당적 이동= 배신ㆍ변절'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 정치 현실에서 보자면 그 역시 철새 정치인이다.
처칠의 회심은 매우 이례적 사건이었다. 영국 정당은 이념지향적이어서, 하원의원이 당론을 거슬러 표결하는 경우가 드물고 당적을 옮기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런 환경에서 처칠은 보수당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1904년 지도부와 불화를 겪고 자유당으로 적을 옮겼고, 1924년 분열로 약화된 자유당을 떠나 보수당으로 돌아갔다. 일각의 비난에 대해 처칠은 "누구나 한 번 배신할 수 있지만 두 번 배신하려면 창의성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논란을 업적으로 불식시켰다. 자유당 시절 공공 직업소개소를 창설하고 교정제도를 개선하는 등 진보적 개혁을 주도했고, 1차 세계대전 때 해군장관과 군수장관을 지내며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다시 보수당으로 복귀한 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총리를 맡아 나치 정권에 맞섰다.
노동당 소속으로 첫 영국 총리에 오른 제임스 램지 맥도널드(1866~1937)는 생전에 배신자 누명을 뒤집어썼다가 죽은 뒤 정당한 평가를 받은 경우다. 1929년 두 번째 총리직을 맡은 맥도널드는 경제대공황을 맞아 보수당 자유당과 손잡고 거국 내각을 구성,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정적과 협조했다는 그 이유로 배신자로 낙인 찍혀 출당 당했고, 훗날 총리에 오른 클레멘트 애틀리(노동당)의 자서전에서 "영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맥도널드의 진가와 정책적 결단이 온전히 인정받은 것은 사후 40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맥도널드 전기를 쓴 정치학자 데이비드 마퀀드는 "당시 케인스(재정지출 확대)가 꼭 옳았다고 할 수 없다"며 "(재정적자 축소와 긴축을 선택한) 맥도널드는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토니 블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빌 클린턴의 선구자였다"고 평가했다.
알렌 스펙터(1930~2012) 전 미국 연방상원의원은 두 차례 정당을 바꿨다. 청년 시절 민주당원이었던 스펙터는 1966년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꾼 뒤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공화당원이지만 양당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신 행보를 했다.
버락 오바마(민주당) 대통령 취임 이후 오바마의 경제 살리기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그는 공화당에서 상종해선 안될 인물(pariah)로 낙인 찍혔고, 2009년 어쩔 수 없이 민주당으로 적을 옮겼다. 1960년 이후 당적을 변경한 현역 연방의원이 30여명에 불과한 미국 정치에서 스펙터의 탈당은 큰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스펙터가 지난해 10월 사망하자 미국 언론은 양당정치의 극단화를 경계했던 스펙터를 당파 싸움의 희생자로 간주하며 재평가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스펙터의 죽음을 "공화당 중도파의 멸종"으로 평가하며 "중도파가 사라지는 미국 정치에 그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도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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