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국군·인민군·수감·도피로 얼룩진 삶 恨 풀렸지만 전쟁의 진실 더 찾겠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국군·인민군·수감·도피로 얼룩진 삶 恨 풀렸지만 전쟁의 진실 더 찾겠다

입력
2013.02.22 15:44
0 0

6ㆍ25전쟁 당시 인민군 총공격을 제보하고도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다 63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은 홍윤희(83)씨의 파란만장한 삶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삶 자체가 살아있는 전쟁사인 홍씨는 20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남은 진실을 찾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며 무죄 선고와 상관없이 아직 남아있는 전쟁의 진실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30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홍씨는 1948년 굶주림을 이겨내기 위해 서울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우연히 파고다 공원 앞에서 국군경비대를 모집하는 군인을 만났다.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던 그로선 별 고민 없이 국군에 자원했고, 육군본부 감찰감실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다. 홍씨는 1950년 육군사관학교에도 당당히 합격, 그 해 7월1일자로 경기 시흥에 있었던 보병학교로 전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입교를 며칠 앞둔 6월25일 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인생은 격랑에 빠졌다. 6월27일 새벽 한강 다리가 끊어지자 홍씨는 사흘 동안 인민군을 피하며 서울 야산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결국 홍씨는 살아남기 위해 그의 먼 친척인 당시 북한 부수상인 벽초 홍명희의 이름을 팔아 인민군 의용대에 입대했다.

홍씨는 "당시 살아남아 국군에 돌아가기 위해선 인민군 신분으로 최전선에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며 "공산당 선언 유인물을 화장실에서 달달 외워 가까스로 의용군 면접에 붙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950년 7월11일 인민군 경북부대 치안행정대에 배치됐던 홍씨는 이후 인민군 1사단 정찰대로 배속돼 지인의 도움으로 위생반에 편입됐다. 8월26일 위생 훈련 중 우연히 "9월1일 전장 서쪽에 위치한 인민군 제1군이 먼저 진격하고 48시간 후 북쪽에 있는 제2군이 총공세를 펼쳐 부산을 신속히 점령해 통일을 이루자"는 김일성의 총공격 명령을 접하게 되면서, 홍씨는 더 이상 인민군에 남아 있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 31일 밤 인민군 진영을 탈출했다.

다음날 새벽 홍씨는 경북 칠곡 산기슭에서 국군을 만나 일촉즉발의 북한군 총공격을 제보했다. 그는 즉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인계돼 심문을 받았다. 그의 제보로 인민군 총공격에 대비한 육군은 9월1일 인민군의 1차 총공격을 막아내며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공로를 인정받은 홍씨는 9월6일 육군 종합학교 입교를 명받았다.

그러나 5일 뒤 헌병사령부가 느닷없이 그를 간첩혐의로 체포했다. 9월3일 아군과 교전해 피해를 줬다는 것이다. 홍씨는 "당시 나는 부산 대교동에 있던 감찰감 부산분실에 있었다"며 "교전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지만, 혹독한 고문만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해 9월16일 자신이 간첩임을 인정하는 심문조서를 작성했고, 20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몇 차례 재판을 통해 징역 10년으로 감형됐지만, 5년 동안 부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출소한 홍씨는 전쟁의 상처를 잊고 결혼해 안정적인 삶을 누렸다. 그러나 1973년 박정희 정권이 "간첩 혐의자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그는 미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범죄 전력을 지우기 위해 여권 발급 관계자에게 300만원을 들여 로비를 했고, 무사히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으로 이민했다.

홍씨는 이후 미국 UC버클리 대학의 스포츠연구소에 연구위원으로 일했다. 90년대 중반 연구를 위해 자주 도서관을 찾던 중 그는 문득 인민군 총공격이 기록에 남아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홍씨는 "관련 자료를 찾아봤더니 총공격 제보자가 김성준 인민군 소좌로 기록돼 있었다"며 "그 상태라면 난 영원히 간첩으로 남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명예 회복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홍씨는 이후 20여년 간 미 국방성부터 한국 국방부, 청와대까지 동분서주하며 자신의 기록을 찾아 다녔다. 자료가 없다는 한미 양국의 대답만 돌아오자 그는 UN 북한부 황봉수 영사에게도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포기하지 않은 그의 노력은 2011년 봄, 결실을 맺었다. 6·25 전쟁사의 최고 권위자인 로이 애플먼의 '홍의 정보(The Hong's information)'라는 메모에서 "홍씨가 9월 총공격을 국군에 제보했다"는 내용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그 해 6월 애플먼의 자료를 근거로 한국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2년여를 끌어온 재심재판에서 지난 13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사법부 일원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법 체제에서 나온 판결에 유감을 표하며 이번 판결이 뒤늦게라도 지난 시간에 대한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홍씨는 "무죄가 입증됐다고 바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돈에 눈 먼 가짜 민주투사처럼 되진 않을 것"이라며 "신중히 고려해 소송을 할지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기록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더 정확한 전쟁 정보를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