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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CIA 도왔더니… '헌신짝' 된 이중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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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CIA 도왔더니… '헌신짝' 된 이중첩자

입력
2013.02.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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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30일 예멘 북부 사막지대에서 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의 지도자 안와르 알 올라키가 미군 무인폭격기(드론)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알 카에다의 뛰어난 웅변가이자 전략가였던 알 올라키는 9ㆍ11테러 연루 의혹, 2009년 성탄절 미국 여객기 폭파 기도 혐의 등으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최우선 제거 대상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서 "알 카에다 퇴치의 중요한 이정표"라고 반겼던 이 암살작전에는 미지의 인물이 개입했다. CIA 및 덴마크 보안정보국(PET) 편에 서서 AQAP의 핵심조직에 잠입했던 덴마크인 모르텐 스톰(38)이다. 알 올라키 행적 추적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 이중첩자는 그러나 이제 CIA를 자신의 공을 가로챈 신의 없는 조직으로 몰아붙이는 폭로자가 됐다. 덴마크 일간 질란드포스텐이 모처에 은신 중인 스톰과의 120시간 인터뷰와 관련 서류 및 증거물을 토대로 보도한 알 올라키 암살작전의 전모를 스톰의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했다.

나는 무라드 스톰이라는 별명으로 급진 이슬람계에서 잘 알려져 있다. 이슬람으로 개종해 유럽, 중동의 모스크(이슬람사원)을 찾아다니며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2006년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이슬람 신앙과 대의명분에 환멸을 느꼈다. 그해 겨울 나는 이중첩자가 될 결심을 하고 PET에 연락했다.

내가 이슬람에서 명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PET는 나를 CIA와 영국 정보국의 요원들과 접선하게 했다. 나를 알 올라키 제거를 도울 적임자로 여긴 그들과 잠입 방법을 논의했다. 이슬람에서는 무라드, 정보기관에서는 비밀요원 아히(아랍어로 형제를 뜻하는 말)로 불린 나의 이중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알 올라키와 나는 2006년 초 예멘 수도 사나의 알 이맘대학에서 사제지간으로 처음 만났다. 급진적 이슬람 교리를 강의하던 그는 미국 태생이라 같은 서구 출신인 나와 대화가 잘 통했다. 유럽에서 손전등, 태양광패널, 다용도칼 등을 구해 달라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신뢰를 쌓았다. CIA는 그 물품들에 위치추적장치를 달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알 올라키가 알 카에다 거물로 급부상하면서 소재 파악이 더욱 힘들어졌다. 나는 남부 예멘에 있는 그의 은신처를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행여 정체가 들통날까 걱정하는 나를 그는 무장대원들 앞에서 포옹하며 환대했다. 식사 후 따로 대화할 때는 "생화학무기로 서방의 대형 쇼핑센터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를 정보요원들에게 즉각 보고한 것은 물론이다. CIA는 내가 알려준 알 올라키의 은신처를 몇 달 뒤 폭격했지만 그가 이미 거처를 옮긴 뒤였다. 알 카에다는 나를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예멘 정부의 감시 아래 있다고 확신했다.

2011년 봄 PET의 연락을 받았다. 접선 장소인 코펜하겐의 해변호텔에서 그들은 전용 아이폰과 노트북을 건네주며 새삼 임무를 강조했다. 알 올라키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며 내가 그 길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지 않았다. 알 카에다의 의심 때문에 알 올라키를 방문하는 일이 더는 불가능했다. 궁리 끝에 알 카에다 기관지 '인스파이어'에 '북극곰'이란 이름으로 메일을 보냈다. 북극곰은 알 올라키가 내게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에게 메일이 반드시 전달되리라 믿으며 "예멘에 곧 가는데 뭐든 도울 준비가 됐다"고 썼다. 답신이 왔다. "심부름꾼을 통해 전달사항이 담긴 USB 메모리를 보내겠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은 것이다.

7월 사나에 도착해 세 번의 시도 끝에 쇼핑몰에서 USB메모리와 300달러를 지참한 심부름꾼을 만났다. 요청받은 물품들을 구입해 이날 저녁 심부름꾼 편에 보냈더니 며칠 뒤 알 올라키가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연락이 재개돼 몇 차례 접선이 이뤄진 뒤 그는 자신에 관한 서구 언론의 기사와 생화학무기 재료를 저장할 이동식 냉장고를 요청했다. 때가 왔다고 판단한 CIA와 PET는 나를 스페인으로 호출했다.

나는 작전대로 알 올라키가 신뢰하는 중개인과 접촉, 개인사정으로 출국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기사가 담긴 USB메모리를 맡겼다. 그가 접선할 알 올라키의 심부름꾼이 우리를 목표물로 인도해줄 것이었다. 말라가에서 만난 요원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며칠 뒤인 9월 초 사나 쇼핑몰에서 심부름꾼을 만나 물건을 전달했다는 중개인의 전화를 받았고, 3주 뒤 알 올라키가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CIA가 내가 일러준 접선 장소에서 심부름꾼을 체포해 알 올라키의 은신처 정보를 캐낸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CIA가 알 올라키와 가까운 10대 소년을 구금했다"는 뉴스가 서방 보안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됐을 때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중개인이 물건을 받으러 온 심부름꾼이 15~17세 정도였다고 내게 말했기 때문이다. CIA가 작전 성공의 공을 자기네 요원들에게 돌리고 있다는 말을 PET 요원에게 들었을 때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공적에 대한 합당한 인정과 보상이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PET의 종용에 못 이겨 코펜하겐 해변호텔에서 만난 CIA 요원이 설명한 작전 실행과정은 우리가 함께 세운 계획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데도 그는 "당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알고 있다" 운운하더니 "알 올라키 살해는 당신이 아니라 별도로 진행된 유사 작전 덕분"이라고 못박았다. 그들은 덴마크처럼 작은 나라의 요원이 자신들을 알 카에다 거물에게 인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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