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의 는 내가 읽은 어떤 책보다 신선했다. 그리고 그 평가는 8년이 흐른 지금까지 유효하다. 우연히 집어든 전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흥미로웠던 터라 이 책을 사는 데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10편의 단편을 묶어놓은 이 책은 기발하다 못해 '아니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인가' 싶게 고정관념을 전복시킨다. 그가 날리는 크고 작은 잽을 맞으며 낄낄대다가 감동하다 종래엔 박민규가 만든 독특한 세계에 푹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표제작 '카스테라'는 학교 근처 원룸에 들여 놓은 소음이 심한 냉장고에 관한 이야기다. 분명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라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다, 어떻게 이 따위 걸 팔 생각을 했는지 분해하던 남자가 결국 외로움에 지쳐 냉장고를 가지고 벌이는 온갖 황당무계한 공상이 진지하게 전개된다. 간단히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을 배운 주인공은 중요하거나 해악적인 것을 냉장고에 넣기 시작한다. 처음엔 빚을 지고 아들에게 찾아온 아버지를, 그 다음엔 잔소리를 늘어 놓는 어머니를, 학교를, 동사무소를, 신문사와 오락실과 7개의 대기업과 67명의 국회의원과 대통령 등 이것저것을 집어 넣는다. 모든 것은 '문을 연다-넣는다-문을 닫는다'의 아주 간단한 절차로 처리된다.
박민규를 2000년대 최고의 문제작가이자 화제작가로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후 아류들이 숱하게 양산됐지만 무규칙적인 것만 닮았을 뿐, 지나친 자기파괴와 알맹이 없는 단상을 이어가는 것에 그쳤다. 박민규 소설을 관통하는 철학을 베낄 수 없었기에 공허한 메아리로 그친 것이다. '이 냉장고는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라고 소음을 옹호하며 논리를 펴고, '분명, 지금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야. 냉장고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충분한 공감이었다.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라고 중얼거리는 부분처럼 근사한 철학을 말이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 생활고에 지친 조용한 소년이 기린 모습의 아버지를 지하철에서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도 퍽 인상적이다. 주유소와 편의점 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지하철 푸시맨을 하고 있는 조용한 소년은 사라진 아버지를 만나 반갑게 근황을 얘기하지만, 기린은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듣고 그저 자신의 앞발을 소년의 손 위에 포개고 천천히 이렇게 얘기할 뿐이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일흔세 곳의 직장에서 퇴짜를 맞고 유원지 오리배를 관리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주인공이 시시한 오리배의 세계가 배후에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가 없는 오리배 세계시민연합 구성이라는 다국적 네트워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회사로부터 거부당한 자신에 대한 속박을 푼다는 '아, 하세요 펠리컨' 역시 아등바등 메이저의 세계에 끼는 것만이 최선인지 회의적으로 이야기 한다.
기린은 물론 뜬금없이 펠리컨, 개복치, 대왕오징어, 도도새 등 갖가지 동물들을 기발하게 활용하는 이 소설은 기존의 문법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독특하고 도도한 저작물이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작가의 의뭉스러움이 밉지 않은 것은 책 전반에 흐르는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과 그것을 풀어내는 유쾌하고 공손한 방식 때문이다. 박민규의 소설 어디에도 원망은 없다. 루저가 될 지언정 명랑을 잃지 않고 상황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나름의 방안을 모색한다.
작가에게는 실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연이은 다른 소설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박민규 최고의 작품으로 이 책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발랄한 소설을 풀어놓고 제목을 지은 센스 역시 감탄스럽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같은 제목은 정말 상큼하지 않은가.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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