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도 못하는 사람을 굳이 데려다 영화를 찍게 하는 건 잘하는 걸 하라는 뜻일 테니 해 달라는 걸 해줬다."
칸과 베를린, 베니스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박찬욱(50)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찍은 첫 영화 '스토커'로 '박쥐' 이후 약 4년 만에 국내 관객과 만난다. 이 영화는 박 감독과 일해보고 싶었으나 그가 남의 각본으로는 영화 만들지 않는 줄 알고 연락하지 않던 미국 제작사 '스콧 프리'가 박 감독 측의 영화 제안을 살갑게 받아들여 빛을 보게 됐다.
그는 국내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주연 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23)와 21일 기자회견에서 "낯선 땅에서 외롭고 어려움이 많았는데 조국에 와서 공개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다"며 "독특한 영화라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염려가 된다"고 말했다.
TV시리즈 '프리즌 브레이크'로 유명한 배우 웬트워스 밀러가 쓴 '스토커'는 갑자기 나타나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삼촌과 그를 의심하는 조카 사이의 긴장을 그리고 있다. 얼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초기 걸작인 '의혹의 그림자'(1943년)를 떠올리게 한다. '스토커'의 주인공은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18세 소녀 인디아(바시코브스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찾아오면서 어머니 이블린(니콜 키드먼)과 기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영화는 초반에 '의심'에 무게중심을 두었다가 스토리가 '성장' '혈연'으로 옮겨가며 '의혹의 그림자'라는 그늘을 걷어낸다.
지난달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됐을 때는 '스토커' 시나리오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현지 평론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박 감독의 연출력에 대해서는 평가가 좋았다. 미국 영화전문지 '할리우드 리포터'는 '무언가 불안하게 만드는 박찬욱의 시각적 표현과 배우를 다루는 솜씨 덕에 밀러의 시나리오에서 자주 보이는 허점들이 가려진다'고 평했다.
실제로 박 감독은 뻔한 B급 스릴러를 연상하게 하는 빈약한 플롯에 풍성한 상징과 은유, 치밀한 심리묘사를 채워 넣었다. 거기에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까지 더해져 영화는 우아한 심리 스릴러이자 기묘한 성장 스토리로 환골탈태한다. 박 감독은 "이 각본을 선택한 건 누가 연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라며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여백이 많아 채워 넣을 수 있는 게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는 40여회차의 촬영 끝에 완성했다. 그는 "한국에서 찍는다고 가정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의 절반 수준"이라면서 "현장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초 단위로 진땀 빼면서 찍어야 했던 점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니콜 키드먼 같은 배우들과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 영화 '파이' 때부터 좋아했다는 영화음악 작곡가 클린트 맨셀, 영화 포스터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메리 엘렌 마크 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영화의 큰 소득이었다고 덧붙였다.
바시코브스카는 박 감독을 "지금까지 같이 일한 다른 감독들과 달리 섬세하고 디테일에 강하면서 배우들의 생각을 듣고 나서 반영해주었다"며 이번 촬영이 "멋진 경험"이었다는 말했다.
'스토커'는 28일 한국에서 먼저 개봉한 뒤 미국에서는 3월 1일부터 상영한다. 미국에서는 전국에서 동시 개봉하는 '와이드 릴리즈' 방식이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 먼저 상영하고 관객 반응에 따라 규모를 확대하는 '롤아웃' 방식으로 선보인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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