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후보자들, 국가의 재상이라 불릴만한 고위직 후보들이 최근 연달아 언론과 정치권의 검증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사실 장관이상의 고위직에 대해 선진국 수준의 검증 과정을 만든 것은 바로 여야 정치권이었다. 위장전입, 불법 또는 편법에 의존한 병역면제, 부동산 투기, 위장 학력 등은 지난 10여년간 자주 등장한 낙마의 단골 소재였지만, 2013년인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이유로 리더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는 윤리적으로 모범이 될만한 리더가 적은 것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고위직 자리 자체가 고시를 패스하거나 큰 돈을 버는 것처럼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일종의 목적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까지 올라가는 과정보다 결과만을 보고 사람을 평가해왔고, 과정의 윤리성이나 정당성을 검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공직자 재산공개와 같은 검증장치마저도 공개 거부와 같은 여러 가지 우회로와 도망갈 구멍이 있기에 투명성 보장 장치로서의 기능에 한계가 있다. 그런 허술함 속에서 승승장구 하다 보니,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청문회'라는 복병에게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남자의 자격'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출연진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합창도 하고 라면도 끓이고 발명왕이 되려고도 하고 배낭여행도 함께하면서 '남자의 자격'을 갖추어간다. 하지만, 우리의 처지는 '리더의 자격'을 논한다는 것이 사치스러운 지경이다. 청문회가 제대로 되려면 후보자의 재산형성 과정이나 병역에 전혀 문제가 없어야 하고, 청문위원들은 직무적합성이라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과연 후보자가 해당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지 학력과 경력을 검토하면서 직접 물어보고, 조직 통솔에는 문제가 없는지 이전에 그 사람 밑이나 위에서 일했던 사람들에게 탐문하며, 공사(公私) 구분은 잘하는지, 인사는 공정하게 하는 사람인지 캐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청문회는 권투에 비하자면 경기전 계체량 측정에서 다 나가떨어지는 판국이다.
그렇다면 치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꼼꼼한 검증을 하는 청문회를 없애야 할까? 그렇지 않다. 국민들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청문회를 보면서 '리더의 자격'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학습의 기회를 갖는다. 언젠가 국사(國事)를 맡고자 하는 어린이와 청년들이 올곧은 길을 가야만 리더가 되기 위한 지난(至難)한 과정을 통과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청문회는 일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국민 교육, 집단 학습의 장으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청문회를 탓할 것이 아니라 청문회에 자랑스럽게 올릴 수 있는 인재의 부족, 또는 그런 인재를 찾아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나 전문가, 기관의 부족을 탓할 일이다.
한 때 우리는 중앙인사위원회라는 조직을 별도로 두어 국가 주요 직위에 앉힐만한 사람들을 미리 정리하고 분석해두는 일을 맡겼었다. 또 일각에서는 인사만을 담당하는 전문 공무원제를 활성화해서 좋은 인재를 찾아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인사는 리더십의 고갱이이자 리더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종합예술이기에 더 나은 인사를 위한 노력을 잠시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더 이상 가벼이 넘길만한 경구가 아니다. 앞으로는 국민으로서 기본의무를 어긴 사람을 단죄할 수 밖에 없는 청문회보다는 '당신은 과연 이 직무에 어울리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청문회를 보고 싶다. 작금의 언론 보도를 보노라면 그렇게 깨끗한 사람들은 고위직 후보가 될 수 없다는 냉소와 조롱까지 넘실거린다. 이는 바로 고위직들을 보는 민심의 무게를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 출발하는 것에 기대를 갖는다. 새 물건, 새 학기, 새 친구…하지만 새로운 리더에 거는 기대는 결코 다른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기대를 버리기는 쉽지 않다. 바로 민심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우리'의 리더를 찾는 일이기에.
김장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교수
김장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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