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토머리라 했던가? 입춘이 지난 지 2주, 행인들은 단단히 동였던 목도리를 풀었고 옷차림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거리는 활기차고 얼었던 화단이 녹기 시작하며 천천히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고 있다. 봄이다, 어느새 봄이다. 봄이 성큼 왔다. 봄은 유독 성큼이라는 부사가 잘 어울린다. 설이 지나고 새로운 각오를 말하거나 다짐을 하던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약간은 들떠 있던 명절 기분에서 빠져나온 지금, 이제 사람들은 각오와 희망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꿈꾸기보다 눈앞에 쏟아진 본격적인 한해의 삶을 염두에 두는 듯하다. 짧은 휴가에서 복귀한 이등병처럼 지인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2012년 겨울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이 있었고 대선을 앞뒤로 각종 정치 사건들이 국민에게 노출되었다. 새로운 사건을 인지하기도 전에 또 터지는 스캔들 때문에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통각이 많이 무뎌진 것 같다. 하지만 상처는 봉합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고 있다. 눈 속에 방치되어있던 쓰레기가 눈이 녹으며 드러나는 것처럼 봄이 오면서 덮어뒀던 일들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시신이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60일째 고인을 모신 관은 아직도 고인이 근무하던 공장 바닥에 폐선처럼 정박해있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유족들은 48시간에 한번 관속에 드라이아이스를 넣는다고 한다. 사랑하는 가족의 주검이 온전할 수 있도록 이틀에 한번 관 뚜껑을 열어야 하는 유족들의 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건 극장에서 상영하는 비극의 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었다면 수십 명씩 찾아오는 이들이 유족들의 손에 쥐어주고 간 불량식품처럼 달콤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고 있고 지켜질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국민 과반수의 선택이 아직 시작도 하기 전에 국민들과 불통이다. 새 희망은 소통의 창구가 차단된 밀실에 앉아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믿을 수 있게 하려면 실체라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정책과 실무자를 결정하고 통보하듯 발표하는 일은 전혀 국민을 위한 일이 아니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준다던 새 정부의 201개 공약은 어느 정도쯤 실현하고 있을까? 정말 좋은 말은 다 썼다. 그 무수한 공약을 걸고도 노동현안들을 해결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다니, 시작부터 김이 빠진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혹자들은 필자가 이 일에 쓸데없이 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갑과 을의 입장은 서류상으로 명백하게 정리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도의적으로도 완벽할 테니까. 그럴 수도 있다. 필자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분개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필자도 내부에서 벌어진 일은 세세하게 알 수 없었고 언론을 통해 접한 일들과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알아본 정보만 가지고 있으니까. 그나마 더 자세한 사건을 알 수도 없다. 이미 모든 언론의 '관심' 밖에 있으니까. 우리는 연예계에서 터지는 스캔들이 온종일 모든 뉴스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봄은 왔지만 그들은 아직 겨울의 한 중간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것들 바쳐 잘 살아보려고 했던 그들이 158억원의 손해배상 소송 앞에 서있다. 한 무리의 근로자였던, 지금은 범법자인 그들이 봄이 오는 공장 담장 밖을 바라보고 서있다. 대화하자, 기다려보라는 불량식품 같은 약속을 손에 꼭 쥐고서 우리들의 봄을 구경하고 서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봄을 나눠주어야 한다. 동참하자는 것도 투쟁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봄볕처럼 따뜻한 관심을 전해주자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관심이 더해지면 최소한 따뜻한 위로가 그리고 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가족의 관을 껴안고 있는 외롭고 고립된 그들에게 조금 늦더라도 따뜻한 봄이 찾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정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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