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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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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안녕한가요?

입력
2013.02.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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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제주 애월에서 쓰고 있습니다. 애월(涯月)-물가에 어린 달. 소설가 김훈이, 그곳에 살면 저절로 시인이 되겠다고 부러움을 토로한 곳. 그런 곳에 살고 있습니다. 40년 타향살이를 접고 고향에 돌아와 귀향살이에 맛을 붙인 지도 어느덧 5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귀향이라고 하면 귀농이나 전원생활을 연상해서 부러워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사실 만만하거나 녹록한 일이 아닙니다. 귀향이든 귀농이든, 이제까지 해오던 것과는 다른 삶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고 보면, 그 서먹하고 새삼스러운 환경과 생활방식에 적응하는 과정도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곳 제주에서 얼마 전에 약소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행사의 이름은 ‘기억의 현장에서 도시의 미래를 보다’. 좀더 설명하면 제주시의 원도심을 답사하는 작은 여행이었습니다.

제주시내에는 관청인 목관아를 중심으로 동문·서문·남문이 있었습니다(북쪽은 바다에 면해 있기 때문에 성문이 없었고요). 그래서 성문 안을 성안이라고 불렀고, 이 성안 중에서도 옛 성이 있던 곳을 ‘무근(묵은)성’이라고 부렀는데, 탐라국 시절의 옛 성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안은 서울로 치면 4대문 안에 해당할 것이고, 무근성은 그 중심인 종로에 해당하겠지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이 제주의 중심지였습니다(이곳에 있는 북초등학교는 개교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개발로 신제주 일대가 발전하고, 2000년대 이후에는 변두리였던 시청 주변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무근성은 텅텅 비어, 이른바 도심공동화 현상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행사는 그렇게 쇠락해버린 무근성(원도심)을 찾아가 옛 자취를 더듬으며, 이곳을 되살릴 방법은 없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취지였던 셈이지요. 평일인데다 비까지 내렸지만 30여명이 모였고, 간간이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두 시간 남짓 걸었습니다.

나는 무근성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제주를 뜰 때까지 그곳에서 자라고 뛰놀았습니다. 그러니 무근성은 나에게 고향 속의 고향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귀향하자마자 조상을 찾아뵙듯 가장 먼저 찾아야 했을 텐데, 죄송하게도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몇 번 그 외곽에서 두리번거리며 기웃거리기만 했을 뿐, 그 속창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쇠락했다는 소문이 하도 무성해서, 폐허처럼 을씨년스럽게 변한 꼴을 목도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번 행사에 참가한 것도, 행사를 준비한 후배의 요청도 있었지만, 이 기회에 슬쩍 단체에 끼어, 일반 구경꾼처럼 슬그머니 지나가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무근성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사라져버린 길도 있고 새로 생긴 길도 있었습니다. 생뚱맞게 느껴지는 슬라브 건물도 있고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초가집도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한때 살았던 집터엔 새 집이, 그러나 오래 전에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 짧은 여행은 눈앞의 현실과 아련한 기억 속의 과거를 오가는 시간여행이기도 했습니다. 군데군데 폐가가 있을 정도로 쇠락한 풍경이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곳곳에 아기자기한 구석들이 남아 있어 정겹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어린 내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 저릿했습니다. 아니, 어떤 곳에서는 구슬치기나 자치기를 하고 있는 나와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녀석에게 “자, 봐라! 이게 너의 반세기 뒤의 모습이다.” 하면서 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쇠락해진 것이 어디 고향뿐이겠습니까. 그동안 나도 늙었고, 고향을 지키던 어머니도 늙으셨습니다. 그렇게 노쇠해진 어머니도 여전히 우리의 어머니인 것처럼, 그동안 쇠락해졌다 해도 고향은 여전히 우리의 고향 아니겠습니까.

설을 맞아 고향에 다녀온 분들도 많으시겠지요. 고향은 안녕하던가요?

김석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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