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복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마가 강타한 다음날인 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220 인근 먹자골목 일대는 무너진 건물 잔해와 잿더미로 아수라장이었다. 건물 8채와 19개 점포가 형체를 알 수 없이 타버린 화재현장 주변에는 검게 그을려 흉물스럽게 변한 건물들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대부분 지은 지 40년 이상 된 낡은 목조 건물들이다.
화재에 약한 목조 건물 수십 채가 별다른 소방 안전장치 없이 밀집해 있어 상인들 사이에서 화약고처럼 여겨졌던 곳이다. 더욱이 화재 현장에서 문화지구인 인사동 거리까지 걸어서 1분 남짓이어서 불길이 번지면 인사동 일대까지 휘말릴 수 있는 화재 위험지역이다.
먹자 골목의 단골손님인 직장인 이모(45)씨는 "오래된 건물들이 빽빽하게 붙어있어 올 때마다 불안했다"며 "소화전, 소화기는커녕 그 흔한 화재 경고 문구 하나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먹자골목과 인접한 인사동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경환(44)씨도 "평소에 화재 걱정은 많지만 실질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인사동 먹자골목은 실제로 화재 무방비 상태였다. 수십 채의 낡은 목조건물은 다닥다닥 붙어있고 LP가스통과 변압기는 언제라도 뇌관으로 작동할 수 있을 만큼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여기다 골목길마저 폭이 2m도 안돼 화재 시 소방당국의 대응이 사실상 불가능한 곳이다. 실제로 화재 당시 일대 소방길이 확보되지 않아 소방차 60여대와 소방관 180여명이 출동했으나 단 7대만이 화재진압에 투입됐고 불길을 잡는 데 두 시간여가 걸렸다.
사정이 이런데도 인사동 먹자골목은 화재 발생 우려가 높거나 화재 발생 시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될 경우 소방당국이 상시 특별 관리하는 '화재경계지구'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화재경계지구로 지정될 경우 소화전과 비상소화장치함 등 소방시설을 구비해야 하고 소방훈련과 소방검사를 연 1회 이상 실시하게 된다. 또 점포마다 한 개 이상의 소화기를 갖도록 돼 있어 최소한의 화재 안전 및 예방장치를 가질 수 있다.
종로 소방서 관계자는 "유동 인구가 많고 골목이 좁아 화재에 취약한 곳이지만 화재경계지구에 지정되지 않아 따로 예방 관리를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1986년 창신동 만물시장과 돈의동 쪽방이, 1993년도에는 장사동 시장, 관수동 공장 지대, 예지동 시장이 화재경계지구로 지정됐지만 인사동 일대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결국 상인은 물론이고 소방당국도 20년 동안 뒷짐만 진 채 인사동 먹자골목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현재 화재경계지구에는 서울 시내 20곳이 포함돼 소방당국의 관리를 받고 있다. 소방방재청은 사고가 나자 뒤늦게 서울 종로구 인사동 등 전통문화거리를 화재경계지구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한편 화재사고를 조사 중인 서울 종로경찰서는 이날 소방당국 등 25명으로 구성된 합동감식반을 꾸려 6시간 동안 감식 작업을 벌였지만 정확한 발화지점과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누전 등 시설 문제나 방화 등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계속할 방침이다.
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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