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TV 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드라마보다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피곤하고 지친 뇌를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데에 예능만한 게 없다고 굳게 믿으며 살고 있다. 요새 재미있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다. 달인 김병만이 족장이 되어 출연자들과 나미비아, 바누아트 등 들어보지도 못한 오지에 들어가서 생존을 위해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새로웠다. 나만 재미있는 게 아닌 것이, 시청률이 10% 후반대로 안착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이 출연하는 정글의 법칙 스핀오프까지 나오는 등, 예능이라는 정글에서 '정글의 법칙'은 성공적 포맷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출연자의 소속사 대표가 자신의 SNS에 '개뻥 프로그램, 여행 가고 싶은 나라 골라서 호텔에서 밤새 맥주를 1,000달러나 사서 마시고…'라는 글을 올리며 파문이 시작됐다. 취중에 실수라며 사과를 했지만 사람들의 의문은 커졌고, 급기야 제작진도 방송의 완성도를 위해 약간의 과장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병만족'의 생생한 체험을 애정을 갖고 지켜보던 시청자들의 실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마치 과거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유출되어 리얼버라이어티가 아니라는 의혹이 생겼던 일과 유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저 하나의 해프닝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누구도 '정글의 법칙'을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을 믿으면서 보지는 못할 것이다. 한 경솔한 매니저의 취중 실수가 안정적이고 성공적 프로그램에 결정적 흠을 낸 것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단단한 건물이라고 해도 붕괴의 시작은 작은 균열에서 시작한다.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단단한 신뢰도 작은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무너져 내린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상대가 속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남을 의심하는 일은 꽤나 에너지가 많이 들어 피곤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자잘한 속임수는 눈감고 넘어가 준다. 그게 차라리 전체적 에너지 보존의 측면에서 보면 이득이니 말이다.
그런데, 한 번 의심하게 될 만한 정황이 포착되면 뇌 전체에 비상벨이 켜진다. 레이더의 감도를 확 높인다. 전에는 그냥 넘어가던 것들도 하나하나 샅샅이 뒤지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도 모두 검수를 한다. 서로 피곤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양측 모두에게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과거 상대에게 기대했던 그 만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은 다른 상대를 찾을 수밖에 없다. 1965년 장영철은 '프로레슬링은 다 쇼다'라고 선언을 했다. 김일의 박치기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경악을 했다. 국민스포츠였던 프로레슬링의 쇠락은 사실상 거기서 시작했다.
그렇기에 선의를 갖고 믿는 대중의 마음에 의심의 불을 켜게 해서는 안 된다. 소중한 가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헌법재판소를 보면서 같은 맥락에서 불안해진다. 이동흡 후보의 청문회와 헌법재판관이면서 검찰총장 후보자 검증에 동의한 안창호 재판관이 균열의 시작으로 보였다. 대통령 탄핵의 정당성까지도 판단하는 헌법재판소는 국민정서에서 보면 사회적 판단의 최상급기관이다. 여기서 맞는다고 하면 맞는 것이고, 아니라고 하면 아니다. 지금까지는 거기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그런 판단을 해줄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모두가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사태를 통해 헌법재판소에 대한 무한 신뢰에 균열이 가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우려가 된다. 사회의 안정을 위해 지키고 만들어왔던 소중한 가치가 이런 사건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예능 프로그램은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지만, 헌법재판소는 대체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원인 제공을 한 두 사람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억울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가치를 사회가 지켜내야 할 만큼 보통 이상의 책임감을 갖고 처신했어야 옳다. 이미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헌법재판소란 단단한 가치에 대한 의심과 균열은 시작된 것 같다. 아쉽기 그지 없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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