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이 조금은 낯설었다. 그러나 진한 눈썹에 코를 중심으로 돌출된 듯한 얼굴이 친숙했다. 세월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흰색 라운드 티셔츠 위로 희미하게 드러난 뱃살만이 49세의 나이를 그나마 대변했다.
애니메이션 '크루즈'(5월 국내 개봉)의 목소리 연기로 17일 폐막한 제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을 찾은 할리우드 스타 니콜라스 케이지를 16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 한 호텔에서 만났다. 나른한 표정으로 기대듯 의자에 앉은 그는 여유 있는 웃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여전히 날렵한 몸매와 고민하는 듯한 얼굴에서 그가 출연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와 독립영화들이 연상됐다.
선사시대 천재지변의 위기를 맞은 한 가족의 모험을 그린 '크루즈'에서 케이지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고집불통의 가장 그럭을 연기했다.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보수적인 가장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을 목소리 연기로 보여주었다. 케이지는 "난 언제나 기회를 잡으려 하고 세 번 결혼했을 정도로 삶에 변화를 주려 하는 사람"이라며 캐릭터에 대한 동화가 쉽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케이지는 영화 속처럼 지구가 큰 위기에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큰 방에 모아놓고 술을 마실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뜨겁게 안아주며 '당신을 사랑한다, 우리 함께 최후를 맞이하자'고 말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목소리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험프리 보가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말론 브란도의 목소리 연기를 여전히 흉내 내고 싶다"고 답했다.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케서방'이란 별명을 얻은 케이지는 가족사랑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내 인생의 주요 관심사는 가족이다. 9년 전 결혼한 지금의 아내와 그녀를 통해 얻은 작은 아들은 전엔 생각지도 못한 경험들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케이지는 15일 오후 열린 베를린영화제의 '크루즈' 레드 카펫 행사에 아내와 다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1982년 데뷔한 뒤 30년 넘게 카메라 앞에 서 온 그는 "항상 배우는 자세이다 보니 지난 연기에 후회를 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항상 진지하게 지내려 한다"고도 했다. "내 나이 49세이고 정상의 위치이니 내 삶을 잘 관리하려고 노력한다. 금요일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지만 주말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월요일엔 내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니까. 내가 그 동안 해온 일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진지해질 수 밖에 없다."
베를린=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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