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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ㅢ자'에 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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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ㅢ자'에 앉다

입력
2013.02.1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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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잘못 눌렀다. '의자'라는 단어를 칠 생각이었는데 모니터에 뜬 것은 'ㅢ자'. 보통은 잘못 친 글자를 얼른 지우고 다시 타이핑을 하지만, 이번에는 'ㅢ자'의 생김새를 물끄러미 본다. 초성 자리에 나오는 'ㅇ'은 원래 소릿값이 아니다. 모음으로 시작되는 글자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일종의 묵음 기호다. 없어도 발음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냥 'ㅢ자'라고 쓰면 안 될까, 하고 문득 억지를 부리고 싶어진다. 'ㅢ'라는 잘못 친 글자가 의자의 실제 모양을 흉내 내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다. 나도 흉내를 한 번 내볼까. 나 홀로 퍼포먼스 1탄. 아끼는 하얀 나무의자를 마루 가운데로 끌고나와 앉아본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가만히 숨을 쉰다. 의자를 흉내 내는 중이다. 혹은 'ㅢ자'를 흉내 내는 중이다. 나 홀로 퍼포먼스 2탄. 이번엔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올려 두 팔로 안는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가능한 한 몸을 동그랗게 만든다. 'ㅢ자' 위의 동그란 묵음, 'ㅇ'을 흉내 내는 중이다. 의자에 앉아 의자에 앉은 존재를 흉내 내는 중이다. 그러니까 'ㅢ' 위의 'ㅇ'이란 단순한 묵음이 아니라 의자 위에 앉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호일지도. 'ㅢ자'에 빈 의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면, '의자'에는 의자에 앉은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일지도. 한가한 오후의 갸륵한 오타가 내게 불어넣어준 소박한 환상이다.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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