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층 주민 분이 조용히 해달라네요.”사실 여부 확인도 없이 ‘죄인’낙인을 찍은 아랫집의 처사에 부아가 치밀었단다. 가뜩이나 이사한 지 얼마 안돼 다른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지내온 터였다. 아이들이 얌전한 편이지만 늘 주의를 주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단지 내 놀이터에서만 놀도록 가사 도우미에게 신신당부까지 했다. 언짢은 마음에 죄 없는 경비원에게 언성을 높였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얼마 뒤 엘리베이터에서 아랫집 아저씨와 조우했다. 아저씨는 아빠 옆에 있던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그 개구쟁이구나”했다. 순간 “내 아들이 내 집에서 시끌법적 떠들고 장난치는 걸 봤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단다.
또 얼마 뒤, 이번엔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현관 문 앞에 바나나, 사과 껍질이 버려져 있었다. 처음엔 가사 도우미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다 흘린 것이라 생각했단다. 그런데 며칠 뒤 이번엔 된장찌개 찌꺼기들이 현관문과 바닥에 뿌려져 있었다. 가사 도우미는 바나나 껍질이나 찌개를 흘린 적이 없다고 했다. 범인은 뻔했다.
고민은 더 깊어졌다. 형사고소나 민사소송 등 법을 통한 해결을 생각해 봤지만 시간과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지 않아 보였다. ‘정면 돌파’도 고려했지만 일이 커질 수 있어 단념했다. 그 무렵, 교회를 다녀온 아내가 이런 말을 하더란다. “오늘 목사님이 설교에서 ‘우리가 서로 10%씩 손해 보고 산다는 마음으로 살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셨어. 꼭 우리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더라.”
그날 저녁, 후배는 과일 한 박스를 사들고 아랫집 초인종을 눌렀다. 아내와 아이들도 함께였다. 아랫집 주인이 놀란건 당연했다. 그동안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한 뒤 응접실에서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그 집에 대학을 졸업한 취업 준비생이 있어 아주머니가 소음에 유독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도 윗집 아이들이 집에서 쿵쾅거릴 만큼 개구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보고 알게 됐다. 또 아파트 층간 소음이 반드시 윗집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후배의 조리있는 설명과 관련 자료에 상당히 놀라워 했다. 나중에 아랫집에서 들린 소음은 후배 집과 붙은 다른 라인 집에서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층간 소음에 대한 후배의 경험담을 자세히 소개한 것은 공동주택 거주자들의 상호 배려와 양보 없이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층간 소음을 100% 차단할 수 있는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제아무리 건설기준을 높이고 새로운 방음소재를 개발한다 한들 돌아오는 것은 아파트 건축비 상승과 거액의 비용 부담뿐이다. 소음기준을 만들어 아파트 관리규약에 반영해도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개별 층간 소음 갈등을 통제하고 조정하기란 힘들다. 소송, 조정 등 법적 해결 절차의 간소화를 고려할 수 있겠지만 법정 분쟁에 대한 부담과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의 초라함에 당사자들의 피로감과 허탈감만 더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층간 소음 문제는 사람 사이의 문제다. 관계의 문제이고 소통의 문제다. 전 국민의 65%가 공동주택에서 사는 시대, 공동체 생활보다 개인 사생활을 더 중시하는 시대에 층간 소음 문제를 해결하려면 낯선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람 냄새가 피어나게 하는 수밖에 없다. 법과 제도에 기댄다 한들 항구적일 수 없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관계 회복은커녕 악연을 만들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방법은 대화 뿐이다. 현관문을 꼭 걸어 잠그고 대면을 거부한 채 관리사무소나 경비원을 통해 간접 대화만 나누다 보면 오해와 감정만 커질 뿐이다. 감정이 쌓인 상태에서 모든 신경을 소음에만 집중하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화차 소리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층간 소음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만큼 서로의 입장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조금씩 손해를 받아들이고 감내하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소통이 화두인 시대, 우리들 모두 배려와 이해의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려 노력했는지 되돌아볼 때다.
황상진 부국장 겸 디지털뉴스부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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